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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탕수육과 짜장면

by 까망잉크 2011. 3. 19.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창작품

[중앙일보] 입력 2010.09.27 00: 39

 

 

1920년께 서울의 중화요릿집. 간판 밑에 현대식 중화요리라 쓴 천조각을 내걸었다. 아마도 당대의 ‘퓨전’ 중화요리를 의미한 것이리라. 얼마 전만 해도 아서원·대관원·안동장·동해루·진아춘 등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중국 음식점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몇 집 남지 않았다. (사진 출처:일제시대 자료 『생활실태조사』)
해방 직후의 어느날 오후, 당대 최고의 청요릿집 아서원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아들의 결혼 피로연을 치르던 시골 부자가 지배인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것이다. 이유인즉 자기는 분명 최고급 요리를 내오라고 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요리가 빠져 하객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배인이 “원래 청요리 축에 끼지도 못하는 음식”이라며 아무리 설득하고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를 그토록 화나게 한 것은 ‘탕수육’이었다.

세계 제일의 인구 부국인 중국은 그만큼 이민도 많이 내보냈다. 가장 많은 이민이 배출된 지역은 광둥(廣東)과 산둥(山東)이며, 이 둘을 묶어 양동(兩東)이라 한다. 그런데 비옥한 농경지를 배후에 둔 광둥인들 중에는 국내의 후견인에게 상당한 자본을 얻어 국외로 나선 사람이 많았던 반면, 토질이 척박한 산둥 출신들은 대개 맨몸으로 떠난 점이 다르다. ‘쿨리(苦力)’라 불린 중국인 최하층 이주 노동자들 중 다수가 산둥 출신이었다. 현재 재한 화교는 95% 이상이 산둥 출신자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재한 화교 사회가 성립한 당초에는 광둥성과 저장(浙江)성 출신이 산둥성 출신보다 많았다. 청일전쟁 이후 돈 있는 화교들이 대거 귀국하고 쿨리들이 몰려 들어옴에 따라 화교 구성이 바뀐 것이다.

가난한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개 세 종류의 칼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이를 삼파도(三把刀)라 하는데, 즉 채도(菜刀·식칼), 전도(剪刀·가위), 체도(剃刀·면도칼)로 각각 음식점·양복점·이발소를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의 재한 화교들도 이들 업종에 대거 진출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음식점이었다.

화교들은 처음 소규모 호떡집을 차렸고, 조금 돈이 모이면 요릿집으로 키웠다. 1920년대 서울에만 200여 곳, 전국적으로 400여 곳의 호떡집이 있었으며, 청요릿집은 서울에 100여 곳, 인천에 20여 곳 등 전국에 200여 곳이 있었다. 화교들의 최대 무기는 ‘저가(低價)’였다. 그들은 싼 값에 적당한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제품을 창안하기도 했다. 자장면과 탕수육도 그런 창작물이었는데, 나오자마자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중국 음식의 대표 지위를 획득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가족 외식(外食)이라는 말은 ‘중국집’과 결부돼 있었다.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돈 주고 사 먹는 것은 주부 자신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끼니 때마다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한다. 외식업소뿐 아니라 음식 자체의 종류가 많아진 때문인데, ‘식재료’의 세계화는 음식과 민족 문화 사이의 정합성도 약화시키고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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