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와 왕실생활의 조화를 이룬 [창경궁]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의 하나인 [창경궁]은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한다. [창경궁]은 세종 때(1418) 상왕이었던 태종을 위해 고려 [남경]의 이궁 터에 [수강궁]이란 이름으로 처음 세웠다.
[창경궁]은 처음에 [창덕궁]의 부속 별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경복궁]이 소실되어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으로서 중요시 되었다.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법궁으로서의 역할보다 왕실의 내전 기능과 왕실의 각종 공식적인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었다.
[창경궁]은 정전을 남향으로 하고 남북 중심축을 따라 각종 전각들을 배치하는 동양 궁궐의 엄격한 형식을 벗어나 자연지형에 따라 용도와 기능에 적합하도록 생활의 편의를 고려하여 조성되었다. 따라서 궁궐의 모양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창경궁]은 조선 왕조 후기 개혁의 군주였던 [정조]임금 일가의 출생과 죽음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개혁을 추진하려던 큰 뜻이 미완으로 끝나는 비원이 서려 있는 곳이다.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었다. 일제는 1907년부터 궁궐내의 많은 전각들을 헐어낸 후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이름마저 [창경원]이라 격하시켰으며, 남쪽 [종묘]와의 중간에 도로를 개설하여 왕궁으로서의 맥을 끊어 버렸다.
백성들과 만남의 장이었던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은 조선 성종 때 창경궁과 함께 지어 졌다. [창경궁]이 고려 시대 궁궐(남경 이궁)의 위치를 고려하여 동향으로 세워진 까닭에 [홍화문] 역시 동쪽을 향하고 있다. [홍화문]은 [돈화문]을 닮았으나 돈화문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백성들과 대면하던 만남의 장소 이었다. 영조 임금은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수렴하였고, 정조는 어머니 혜빈(혜경궁)과 함께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창경궁]을 관통하는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무지개 모양(홍예)의 아름다운 돌다리 [옥천교]가 놓여 있다. 500년이 넘는 [옥천교]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한 도깨비 상을 조각하였다
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 [명정전]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명정전]은 성종 때(1484)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광해군 때(1616) 재건되었다. [명장전]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에서는 각종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식, 궁중연회, 과거시험, 경노잔치 등 왕조의 공식적인 행사가 치러졌다.
[창경궁]은 애초부터 정치를 위한 공간이 아닌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이라 [명정전]은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2단 월대에 단층의 단아한 전각을 세우고, 앞마당에도 박석을 깔고 三道를 따라 품계석을 배치하여 정전의 격식과 왕궁의 위용을 갖추었다.
[명정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행각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로 사용하였다
국왕의 정무 공간인 [문정전]
국왕의 정무 공간인 [문정전]은 다른 궁궐과 다르게 특이한 구도로 배치되었다. 정전인 [명정전]이 동향인데 반해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으로 등을 돌리고 있다.
[문정전]은 국왕이 공식적인 정무를 수행하던 집무실이었지만 한때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의 신주를 모신 魂殿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성전]은 비극의 왕세자 [사도세자]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미움을 받아 [문성전] 앞마당의 [선인문] 인근에서 뒤주에 갇힌 체 숨을 거두었다
임금과 신하가 학문적 교류를 이루었던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과 [함인정]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숭문당]은 경사진 터에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각처럼 지었으며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 있다
[함인정]은 인조 때(1633)에 [인양전]이 있던 터에 세운 정자로서 건물 사방이 벽체가 없이 시원하게 개방되었으며,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왕실 가족의 생로병사가 이어져온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과 [환경전]은 [창경궁] 내전의 일부이다.
[경춘전]은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으나 그 후 여러 명의 왕비와 세자빈들이 사용하였다.
[경춘전]에서는 정조임금이 탄생하였으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하여 [경춘전] 내에 ‘誕生殿’ 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 승하하였다
[환경전]은 왕이나 왕세자가 기거했던 곳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일하게 의녀로서 왕의 주치의가 된 대장금이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과 모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이곳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에게 치료를 받다가 오랜 지병으로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왕실의 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 전각
[통명전]과 [양화당]
[창경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통명전]은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조선 성종 때(1484) 창건된 후 순조 때(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건물에 걸려 있는 ‘通明殿’이란 편액은 순조의 친필로 재건 당시 쓴 것이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는 [통명전]은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숙종 임금 때 경종의 모후인 [장희빈]이 정적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흉물을 [통명전] 주변에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 궁중 비화의 장소이기도 하다.
[통명전] 동쪽에 자리한 [양화당]도 내전의 침전으로 지어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처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던 환궁한 인조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건물에 걸려 있는 ‘養和堂’ 이란 편액은 순조의 어필로 쓰여 진 것이다.
개혁군주 정조의 비원이 서려 있는
[영춘헌]과 [집복헌]
[양화당] 동쪽에 위치한 [영춘헌]과 [집복헌]은 개혁군주 정조 임금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영춘헌]은 정조의 검약한 생활모습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전각 이다
[집복헌]은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이씨의 거처로 이곳에서 비극의 왕자 [사도세자]가 탄생하였고, 그 아들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가 이곳에서 순조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수빈 박씨를 사랑하여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인접한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며 지병을 치료하던 중 이곳에서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큰 뜻을 갖고 추진하려던 개혁의 꿈을 접어야 했다.
왕세자가 정무를 배우며 생활하던 [동궁] 터
[명정전] 서남 쪽, [관천대] 서쪽의 빈 터에서 담장너머 창덕궁의 [낙선재]일원까지는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정무를 익히던 [동궁]터이다.
정조 때에는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세자가 독서를 하며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북쪽 언덕에는 [취운정]을 세워 후원을 조성하였다. [취운정]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만 지금은 [창경궁]이 아닌 창덕궁 [낙선재]의 영역으로 관리하고 있다
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
[춘당지]는 창경궁 동북 후원에 자리한 연못이다. 현재는 두개의 크고 작은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래쪽에 큰 연못의 자리는 원래 왕과 왕비가 친히 농사의 시범을 보이던 11개의 논밭이 있었던 곳이다. 농업을 국가 기반 산업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왕과 왕비가 농사와 양잠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폈다. 이들 논밭을 관리하기 위해서 [내농포]라는 기관을 두기도 하였다. 이들 친경지는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연못을 만들어 보트를 타고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어 훼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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