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29 못 말릴 겹사돈
조선 초기 어렵사리 왕이된 태종은 왕권 수호를 위해 눈을 부라리고 주변을 살피는 통에, 조정은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매우 심했고, 특히 권력에 가까이 다가섰던 권신들은 처신이 가시방석을 깔고 앉은 듯 조심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태종은 챙겨야할 친 사돈이 많았다. 아들이 적자 4명, 서자 8명 모두 12명이었고, 거기에 딸이 적녀 4명 서녀 13명 합해 17명이라, 29명의 아들 딸을 장가 시집 보냈으니, 맺은 사돈이 29명에 이르렀던 셈이다.
태종이 살펴 최고의 벼슬에 오른 사돈은 대개 적자의 장인이거나 적녀의 시아버지였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 장녀 정순공주의 시아버지 이거이(李居易), 차녀 경녕공주의 시아버지 조준(趙浚), 세종임금에 오른 충녕대군의 장인 심온(沈溫), 3녀 경안공주의 시아버지 권근(權近),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 4녀 정선공주의 시아버지 남경문(南景文), 성녕대군의 장인 성억(成抑) 등이 태종의 주요 사돈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영의정까지 올라 끝까지 권좌를 누린 인물은 조준이 유일했고, 권력을 멀리하며 학자로 품위를 지킨 권근은, 벼슬이 대제학에 그쳤으나 명예롭게 천수를 누렸을 뿐이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은 태종과 과거 동기로 친분이 두터웠는데 탐욕이 없어 삶이 편했다. 정선공주 시아버지 남경문도 벼슬 탐이 없었고, 성녕대군의 장인 성억은, 성녕대군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태종의 애틋한 보살핌을 받아 관직이 우찬성에 이르고, 욕심이 없어 그의 일족이 공신 대접을 받았다.
벼슬이 높아 권력을 누린 사돈들은 대개 끝이 불행하였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는 벼슬이 급격히 올라 쉽게 정1품 의정부찬성이 되었는데, 141 8년 세자궁에 기녀(妓女)를 출입시킨 일이 들통나, 세자를 오도(誤導)했다는 탄핵 끝에 유배지에서 쓸쓸이 죽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은, 관직이 수직 상승하여 특승으로 영의정에 올랐는데, 주변으로부터 쏠리는 민심과 주변 관리에 서툴러, 태종으로부터 ‘외척의 득세가 왕권을 위협할 우려가있다’는 의심을 받아, 40대 나이로 안타깝게 처형 당했고, 그의 아내 즉 세종의 장모는 제주목사 관아의 관비로 보내지는 곤혹스런 일을 당했다.
세종은 현직 임금이었으나 상왕 태종의 서슬에서 어쩔 수 없었다.
태종의 사돈들 가운데 탐욕으로 몸을 망친 본보기는 바로 태종의 장녀 경순공주의 시아버지 이거이였다.
이거이는 그의 아들 이저(李佇)가 이미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사위라, 진작부터 묵은 사돈이었는데, 그의 둘째 아들 이백강(李伯剛)이 또한 태종의 사위가 되니, 조선조 500년사에 전무 후무한 겹사돈이었던 셈이다.
이런 이거이는 두 차례 ‘왕자의 난’때 거느렸던 막강한 사병을 투입, 결정적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도록 힘썼던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 공적을 빌미로 그는 너무 기고만장해 세간의 눈총을 받았다.
태종이 왕위에 올라 왕권을 다질 때, 권신들이 거느린 사병(私兵) 혁파문제가 당면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 태종의 설득으로 어려운 과제가 풀리는 듯하는데, 가장 사병을 많이 거느린 이거이와 또 한사람의 공신 조영무(趙英茂)가 목을 걸고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귀양까지 갔다가 풀려 나와, 태종의 특별한 배려로 영의정까지 오른 이거이는, 여전히 왕실 배경을 과시하며 오만했고, 긁어 모은 재력으로 수하에 많은 장정을 두어,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 나질 못했다.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 이거이를 탄핵하자 드디어 태종이 조영무와 짜고 일을 꾸몄다. 태종의 제일 총신 조영무는 지난날 조정이 사병혁파 문제로 시끄러울 때, 함께 반대했던 이거이가 자기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태종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다시 세우자”
라고 했다며, 태종에게 고변했다. 태종은 이를 이복 숙부 이화(李和)와 서사촌(庶四寸)형 이천우(李天祐)에게 알리니, 마침내 일은 크게 벌어져 조영무와 이거이가 대질 심문을 받는데, 이거이는 죽어도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이거이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태종은 속셈이 따로였기에 그를 고향 진천으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끝을 냈다.
이거이는 불손한 성정을 못 버려 통분해하다가 태종12년(1412) 65세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거이의 축출은 태종이 꾸며서 행한 조치였다는 말이 많았으나, 자업자득이라 그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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