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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30

by 까망잉크 2018. 6. 12.


<조선왕조 뒷 이야기>30(주)하동신문 

힘깨나 쓰는 자들이 어쩌다가 외방에서 본의 아니게 얻은 핏줄을 숨겼다가, 뒤에 들어나면 내 것아니라고 뚝 잡아 떼며 오리발을 내미는 낯 두꺼운 꼴은, 우리 사회에 더러 봐 왔던 현상이다. 
한 나라 임금이 아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아들을 자기 씨가 아니라고 돌아서버린 사건이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은 적자 없이, 다섯 후궁들에서 얻은 15명의 아들 외에, 말 못할 사정을 지닌 두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이름도 왕자답지 않게 지은 ‘불노(佛奴)’와 ‘지운(志云)’이었다. 
왕이 되기 전 본부인에게서 자식을 못 둔 이방과(李芳果)는, 고려말 우왕의 총신 반복해(潘福海)의 후실이던 유씨를, 가의궁주(宮主)로 삼아 건드려 아들을 얻으니, 이가 곧 불노였고, 유씨는 방과가 왕위에 오르자 궁주가 되었다. ‘궁주’는 후궁과 비슷한 궁중 여인들 작호였다. 
유씨의 본 남자 반복해는, 고려말 권신 임견미(林堅味)의 사위로, 우왕이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왕을 구해, 우왕의 수양아들이 되고, 관직이 문하찬성사까지 올랐던 공신이었는데, 뒤에 장인 임견미와 딴 마음을 먹다가, 이성계 등 신진세력에 의해 참형 당했다.
유씨는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손위 동서 조박(趙璞)과 혈연이 닿는 인척이었는데, 조박은 어느날 느닷없이 왕위에 오른 정종 이방과 앞에, 유씨가 낳아 친정 어미에게 맡겨져 크던 불노를 데리고 들어왔다.
조박이 불노를 정종 앞에 데리고 온 뜻은, 불노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애는 한때 궁궐 안에서 원자(元子)로 호칭 되었고, 정종도 내심 그를 세자로 삼아 볼까하는 마음가지 품었었다.
그러나 사태는 모질박게 틀어졌다. 호시 탐탐 왕위를 노리며 정종 신변을 살피던 이방원이, 으름짱을 놓으며 반발하였다. 맹호 같은 이방원의 속내를 읽은 정종은 화들짝 놀라, 마음을 일시에 고쳐 먹었다.
그는 아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불노를 자기 아들 아니라고 퉁겼다. 불노는 유씨가 시집올 때 이미 뱃속 씨가 됐던 반복해의 핏줄이라고, 입에 침을 틔기며 시치미를 뗐다. 기가 막힌 가의궁주 유씨는 눈만 깜박거릴 뿐 말이 없었다. 
남의 씨를 안은 여자를 후실로 보듬어 들였다는 상식 밖의 멍청한 짓은, 아무리 따져 봐도 마음이 닿질 않았고, 불노가 반복해의 자식이라 우기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노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게 진실이라며 믿어 달라는 정종의 모습은 참으로 딱했다. 결국 불노는 어미 치맛자락을 잡고 대궐 밖으로 쫓겨났다. 
뒤이어 곧 정종이 물러나 상왕이 되고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는데, 불노는 궐밖에서 자신이 상왕 정종의 큰 아들이라고, 눈치 없이 떠 벌이고 다니다가 붙잡혀 공주에 유배 당했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 한 것은, 정종의 속내를 짐작한 태종 이방원의 보살핌 때문으로 사람들은 짐작했던 불노는, 평생을 승려로 살았다.
정종의 또 한 아들 지운은, 함부로 까불다가 제명대로 살지 못한 공인된 왕자였다. 
그는 정종이 몸종 기매(其每)를 집적거려 생긴 아들이었는데, 정종이 신분이 워낙 천박한 기매를 후궁으로 삼지 않자,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듯, 환관하고 ‘날 보라’는 시늉으로 사통하는 일을 저질렀다. 
성능력 없는 환관을 꼬드겨 어찌 했는지, 궁궐 안이 온통 성추문으로 시끄러웠다. 
체면이 구겨진 정종은, 한때나마 배가 맞아 씨까지 얻었던 인연으로, 기매를 목숨은 살려 궐 밖으로 내 쫓았고, 재빨리 도망친 문제의 환관은, 기어이 붙잡아 목 없는 귀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이 바뀌어 세종시대, 승려 차림의 한 사내가, 자기가 정종의 아들이라고 뻐기며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올라 왔다. 
세종은 또 무슨 왕자가 궐밖에 떠 도는가 싶어, 즉시 관원을 풀어 문제의 사내를 잡아왔는데, 세종이 직접 묻고 따져보니, 쫓겨난 기매의 아들이 틀림 없었다. 그는 원래 병이 있어 절간에 맡겨져 크다 보니 승려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덕이 높은 세종은 비록 천출(賤出)이긴 해도, 꼽아 보면 상왕의 아들로 달갑지 않지만 자신과는 사촌간이라, 세상에 어미를 골라 나온 사람 어디 있으랴 싶어, 환속(還俗)시켜 보살펴 줄까했다.
그러나 중신들이 가만있질 않았다. 그 사내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결국 그의 존재가 왕실을 부끄럽게 할 불씨가 될 것도 같아, 대간들의 뜻을 쫓아 미리 저승으로 보내고 말았다. 왕자답지 않게 굴다가 명을 재촉한, 공인 된 임금의 아들이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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