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33 잠재적 위험 요소는 박살내야!
(주)하동신문
태종1 8년(141 8) 12월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沈溫)이 수원에서 사약을 들이키고 숨졌다. 그가 죽는 자리에는 태종이 보낸 마지막 술한잔과 독약 사발, 그리고 비단끈 한가닥, 스스로 목숨을 끊되 술한잔을 마시고, 죽을 때는 독을 마시던지 비단끈으로 목을 매던지 알아서 고르라는 사돈 태종의 배려였다. 사위가 왕이 된지 넉달만에 벌어진 사달이었다. 나이 45세, 열 아들 안 부럽던 딸 때문이었다.세종이 자신의 장인이 역모의 수괴로 몰려 죽어 가는 꼴을 현직 제왕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했던 일은 고금에 없는 비극이었다. 왕비 심씨가 몇 번이나 졸도를 거듭하는 모습을 본 세종은, 탁자를 내리 치며 형님 양녕이 왜 세자 자리를 팽개쳤는지 이제야 알겠다며 통탄하였다.성품이 강직하기는 하나 인정이 많고 너무 도덕적이기만 한 세종이 과연 왕권을 제대로 지켜 사직을 보전할까 우려하는 마음이 가시질 않은 태종은, 미리 권력을 세종에게 넘겨 사직을 위협할 잠재적 요소들을 물색하려 눈알을 굴렸다. 마침 걸려든게 짐작했던대로 세종의 처가댁 외척 세력이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앉으며, 병권(兵權)은 자기가 갖고 넘겨 주질 않는다 했다. 이는 순전히 신임 세종의 시대에 왕권을 침해할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박살 내기위한 덫이었다. 태종은 보위를 세자에게 양위하자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우의정인 젊디 젊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을 백관의 우두머리 영의정 자리에 바꿔 앉히니, 심온은 사위 덕에 직위가 수직 상승한 셈이었다. 태종은 파격적으로 발탁한 심온을 사은사로 삼아 명나라에 보냈다. 이 순간 심온의 아우로 군부의 중진 총제(摠制) 심정(沈정)이 태종의 심기를 헤집는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병권을 지닌 상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왕궁을 지키는 군사 배치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의논하여 예사롭게 해버린 것이었다. 한편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던 날 벌어진 호화판 환송 광경도 문제가 됐다. 권력 아첨배들이 새 실력자 심온과 눈을 맞추려 거리를 메우니, 거마(車馬)가 도성 바닥을 덮을 만큼 위세가 당당, 과히 임금거동은 저쯤가라는 꼴이었다. 이런 모습을 은밀히 살핀 좌의정 박은(朴은)이 은근히 태종에게 심온에게 쏠리는 힘의 낌새를 고하니, 태종은 “으음!” 하고 말없이 신음을 토했다. 청백 강직하여 태종의 신임이 크던 박은은, 평소부터 권세를 향한 라이벌 관계인 심온을 틈나는 대로 깎았다.심온을 죽인 결정적인 사건은, 왕과 상왕 두 왕궁을 지키는 숙위(宿衛) 때문이었다. 그전처럼 왕궁 한곳만 군사를 배치하면 문제가 없는데, 두곳에 나누려하니 군사가 모자랐다. 이때 숙위를 책임진 총제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과 어울린 자리에서 “이제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한 곳에서 나오는 것만 못하다”라고 불만스런 말을 한 것으로 들어난 것이었다. 이는 평소 병조판서 박습, 참판 강상인과 사이가 좋지 않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상왕이 심온을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고자질로 한몫 보려한 차원 높은 고변때문이었다.그들이 병권을 쥐고있는 상왕에게 불만을 품은 것으로 색깔을 덧칠하여 고하니, 태종은 불같이 노했다. 거기에 좌의정 유정현(柳廷顯), 우의정 박은이 이 덤을 씌웠다.“심정이 한 곳이라함은 어찌 상왕전하를 말함이리오, 반드시 주상(主上-세종) 전하를 가르켰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심온의 뜻일 것입니다!”뿐만아니라 숙위군사를 움직이는데 병권을 가진 상왕에게는 고하지도 않았으니 탈은 컸었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판서 박습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는데, 사후에 목이 잘렸고, 강상인과 심정은 처형되었다. 심온은 반역의 수괴로 몰려 귀국 길에 압록강변 의주에서 결박 당해 내려와 수원에서 자결하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한마디유언을 남겼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박씨와는 혼인을 하지말라!”태종은 나아가 심온의 가산은 적몰하고 그의 아내 안씨(安氏)는 제주관아 관비로 보냈다. 세 아들 준(濬), 회(澮), 결(決)도 어린 몸으로 뿔뿔이 흩어져 귀양을 살아야하는 등, 집안이 문을 닫아야했다. 이런 판국에 영의정이 된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 은 뒤에 자신들의 일을 걱정한 나머지 세종비 심씨도 내쳐야한다고 태종을 졸랐다. 그러나 태종은 왕비를 새로 맞는다면 또다시 외척을 죽여야하는 사태가 있을 우려가 있다며 극구 마다하였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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