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35)묘구
과거에 연거푸 낙방한 ‘우곽’
인간 길흉화복 잘 내다보는 명리학자 류 처사를 찾아
3년 전 장원급제한 광선이 조부 묘를 천하 명당자리에 썼다는 말 듣게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알 길이 없어 우곽은 사주팔자에 밝은 류 처사를 찾아갔다. 류 처사는 돈을 받고 사주팔자를 봐주는 점쟁이가 아니다. 한평생 간지와 음양오행을 파고들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내다보는 명리학자 선비다.
우곽이 꿇어앉아 물었다. “사부님, 또 낙방했습니다. 강 건넛마을 광선이는 함께 서당에 다닐 때도 저보다 공부를 못했고 소과에도 제가 2년이나 빨리 올랐습니다. 그런데 광선이가 대과에는 어째서 3년 전에 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게.”
이튿날 류 처사가 하는 말. “5년 전, 광선의 조부가 이승을 하직하고 천하 명당자리에 누웠네.” 우곽은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3년 전 과거에 장원급제한 광선이가 백마를 타고 사모관대 차려입고 어사화를 끄덕이며 고향에 돌아왔을 때 우곽은 오장육부가 뒤집혔었다. 류 처사의 말을 듣고서야 우곽은 무릎을 쳤다. “그럼 그렇지. 조상 덕에 급제를 했지, 저놈이 무슨 재주가 있다고!”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어느 날 밤. 술에 잔뜩 취한 우곽은 삽을 들고 산으로 향했다. 서너식경을 걸어 용바위 아래 광선의 조부모 묘 앞에 다다랐을 때 우곽은 술이 깼다. 장대비를 맞으며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입관하던 그날을 돌이켜봤다. 5년 전 광선이의 둘도 없는 친구 우곽도 펄럭이는 만장을 들고 상여 앞에 서서 상여 소리꾼의 “북망산천 이제 가면~”으로 시작하는 낭랑한 만가를 들었다. 여기 장지에 왔던 것이 엊그제 일 같았다. 우곽은 이를 꽉 물며 삽을 들었다. “남자가 칼을 빼었으면….”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삼복이 지나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부는 처서가 왔다. 광선이네 집이 발칵 뒤집혔다. 하인들이 벌초를 하러 갔다가 조부모의 묘가 파헤쳐진 것을 발견했다. 썩은 관 조각이 흩어져 있고 유골은 없어졌다. 광선의 부친이 사또를 찾아갔다. 포졸들이 발 벗고 범인을 찾았지만 오리무중.
그 와중에 와불산 김 대감의 선친 묘가 도굴된 것이 알려졌다. 불과 1년 전에 쓴 묘였다. 관 뚜껑은 열려 있었지만 유골은 그대로 있었다.
한양에서 민완 포졸이 내려오고 고을 사또도 밤낮없이 수사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들을 비웃듯 이십리 밖 황 부자의 선친 묘도 도굴됐다.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은 조상 묘 옆에 초막을 지어 하인들을 상주시키며 부산을 떨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지섣달은 무섭고 기괴한 사건들을 세간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섣달그믐날, 우곽이 류 처사 집에 세찬을 보냈다. 설날에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세배를 하러 갔다. 절을 받은 류 처사가 물었다. “자네, 과거는 접었는가?” 우곽이 공부를 하다 막히면 류 처사에게 달려오던 일이 지난해부터 끊긴 것이었다. “예.” 우곽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 왔다. 그날 밤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쓴 박 참봉 모친의 묘를 묘구도적이 파헤치고 있었다. ‘삐그덕.’ 관 뚜껑을 여는 소리는 빗소리에 파묻혔다. 바로 그때였다. “꺄~깨깨깨액.” 파헤쳐진 봉분 뒤에서 하얀 소복에 피를 머금은 귀신이 불쑥 올라왔다. 묘구도적은 기절했다. 귀신이 손톱으로 도적의 목을 할퀴었다.
귀신은 산을 내려가 빗속을 걷고 걸어 류 처사 집으로 들어갔다. 귀신이 탈을 벗고 치마저고리도 벗었다. 류 처사가 부엌에서 몸을 씻었다.
우곽이 광선의 조부모 묘를 파헤쳤을 때, 유골은 버리고 엄청난 부장품을 보자기에 싸왔다. 옥 염주, 금 관대, 호박 단추, 황금 동곳 등. 그 후로 우곽은 묘구도적이 됐다. 류 처사는 고민에 쌓였다. 관가에 발고를 하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제자가 참수당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우곽은 두번 다시 묘구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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