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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37)마님

by 까망잉크 2018. 9. 7.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37)마님

과거 급제한 신랑 한양으로 간 후 독실한 재가 불자 된 ‘마님 보살’

낙향한 신랑 흥청망청하다 죽자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하는데…
 


평생 지근거리에서 왕을 모시고 왕의 눈과 귀와 입이 돼 조정을 주무르던 도승지 인 대감이 퇴임했다. 낙향할 때 왕이 하사한 선물이 바리바리 우마에 실려 내려왔다. 항상 검소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로지 왕만 하늘처럼 받들던 인 대감에게 왕은 여생을 즐기라고 넉넉한 재화를 하사했다.

눈물을 뿌리며 왕궁을 떠난 인 대감. 낙향하는 길, 거치는 고을마다 미리 통보를 받아 기다리던 현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한달여 만에 고향집에 다다랐다. 인 대감은 고향집을 지키고 있던 부인과 마주쳤을 때 깜짝 놀랐다. “나랏일에 골몰하느라 힘드셨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는 부인의 모습은 머리만 자르지 않았을 뿐 여승과 진배없었다. 인 대감은 부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고향집 집사로 있는 조카를 앞세워 광으로 갔다.

자물통이 튼실한 문을 세개나 열고 광 속으로 들어갔다. 초롱 불빛에 여기저기 번쩍거렸다. 왕의 하사품을 광에 넣었다. 사실 광의 금은보화에 비하면 왕의 하사품은 보잘것없었다. 쌓아놓은 청나라 비단을 치우고 멍석을 말자 판자가 드러났고, 그 판자를 걷어내자 지하실 계단이 나왔다. 집사인 조카도 이곳을 들어온 적이 없었다. 지하실에는 황금 송아지, 비취로 만든 비녀, 옥 호랑이, 호박 용 등이 쌓여 있었다. 한양의 궁 밖에서는 초라한 집에 살며 청렴한 척 가장했지만 사실 왕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엄청난 양의 뇌물을 그러모았던 것이다.

인 대감 나이 이제 마흔둘. 그는 항상 왕을 부러워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미리 그려둔 복안을 조합해 설계도를 완성하고 산자락 남향받이 드넓은 밭에 주춧돌을 박았다. 도목수 아래 일곱명의 목수가 달라붙어 뚝딱뚝딱 서른여섯칸 ㅁ(미음)자 모양의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수행집사 홍 생원이 묵직한 전대를 차고 말채찍을 휘두르며 이 고을 저 고을로 쏘다녔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에 삼년을 끌던 ‘왕궁’이 완공됐다. 홍 생원이 채홍사 노릇을 하며 그러모은 ‘궁녀’들이 열둘이나 들어왔다. 연못 위에 세워진 드넓은 정자 홍루정에서는 청사초롱 밝혀두고 매일 밤 연회를 벌였다. 고을 유지들이 다 모였다. 연회가 파하고 나면 인 대감은 ‘상궁’격인 오설댁의 안내를 받아 마음 내키는 궁녀 방에 들어갔다. 고을 사또는 포졸 넷을 인 대감의 왕궁에서 수문장과 순라군으로 파견근무하도록 했다.

어느 날 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인 대감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오늘 밤은 여승이야!” 걸어서 한식경도 안 걸리는 본가로 갔다. 부인이 안방에 모셔놓은 불상 앞에서 염주를 돌리며 독경을 하고 있었다. 인 대감이 촛불을 끈 후 보살 옷을 입은 부인을 덮쳤다. 부인의 적당한 저항은 인 대감에겐 최음제가 됐다. 도대체 얼마 만인가.

옷매무시를 고치며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혼례를 올린 지 한해 만에 과거에 급제한 신랑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독수공방에 몸부림치던 새색시는 뒷산 너머 월암사에서 독실한 재가 불자가 돼 한평생을 보냈다. 손꼽아보니 이제 마흔한살.

동짓달 스무닷새, 날벼락이 떨어졌다. 인 대감이 그 추운 날 밤, 술에 취해 복상사한 것이다. 절에서 화장한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탈상을 했다.

광 열쇠, 곳간 열쇠, 왕궁 열쇠를 거머쥔 안방마님 보살은 궁녀들을 모두 쫓아내고 왕궁을 객주로 탈바꿈시켰다. 조선팔도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매매를 거간하고 그에 따르는 창고업·화물운송업·숙박업도 하게 됐다. 죽은 인 대감의 조카가 집사를 계속했다. 궁녀들이 거가하던 방에는 상인들이 머물렀다. 하룻밤 머무는 사람부터 보름씩 묵는 장기투숙자, 조무래기 상인, 거상 가릴 것 없었다.

어디서 그런 재능이 나오는지 마님 보살은 장사에 도가 튼 거간꾼처럼 객주를 한손에 움켜쥐었다. 상인들과 서슴없이 대작도 했다.

마님 보살은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하룻밤도 빠짐없이 상인의 방에 들어갔다. 눈치 없는 상인이 마님 보살과 객고를 풀고 해웃값을 내놨다가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다.

마님 보살은 낮에 거간을 할 때도, 밤에 상인의 방에 들어갈 때도 고깔을 벗지 않았고, 보살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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