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의 사탑
16세기 말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에서 작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너무나 하찮은 실험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뒤엎은 중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게가 다른 돌덩어리 2개를 294단의 계단 위로 끌어올려, 사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떨어뜨리자, 2개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물체의 낙하 속도는 개개의 질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피사 출신인 갈릴레이는 실험하기에 아주 적당한 건축물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건축가 기욤과 피사 출신 본난노 피사노가 착공했다. 그런데 공사가 3층까지 진척되었을 때, 퇴적층 부분의 지반이 내려앉아 탑이 북쪽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한 뒤, 조반니 디 시모네가 이번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지도록 경사를 계속 수정하면서 완성했다. 종을 매달아 놓은 맨꼭대기 층은 14세기 중반 무렵에 토마소 데 피사노가 지었다. 원통형 바깥 둘레의 지름이 17m, 전체 무게는 14000t이 넘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울기는 점점 심해졌고, 이 기울기를 이용해서 갈릴레이가 실험을 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은 원래 높이 100m 이상으로 세울 계획이었지만, 결국 55m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례당, 무덤(캄포산토)과 더불어 대성당(두오모)에 딸린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여주는 8층 사탑은 옛날 상업 도시 피사에 있는 ‘기적의 광장’을 더욱 개성 있게 만들어 준다. 피사는 리구리아 해로 흘러드는 아르노 강변에 들어선 항구 도시로, 로마 시대에는 유리우스오브 제쿠엔스라고 부른 중요한 해군 기지였다. 11세기에는 상업과 항해 규정을 정해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지중해 동해안 일대에 이르는 상업로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리고 11세기 중반쯤에 사라센족과 싸운 팔레르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지중해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피사 곳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산성비로 인한 건물의 피해가 눈에 띈다. 하얀 대리석은 거무스름해지고, 관광객의 낙서도 끊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축구팀을 응원하는 열렬한 팬이 300m나 떨어진 사탑 맨꼭대기에 올라가 관전한 적도 있다. 사탑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1990년에 사탑을 폐쇄했다. ‘기적의 광장’에 있는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착고한 직후 지반 침하가 일어나 처음에는 북쪽으로, 나중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838년에는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토대 보강 공사를 시작했다. 근래에는 전문가들이 이 사탑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56년 경사가 4m를 넘으면서(약 8°의 경사) 위기를 알리는 경고가 발동되었다. 1993년에 전문가 그룹의 제안에 따라 토대를 납으로, 맨 아래층을 강철 케이블로 보강했다. 지하수의 흐름이 바뀜으로써 일어난 기울기에 일단 쐐기를 박은 것이다. 탑을 해체한 다음 근본적으로 토대를 개선하고, 가공석을 새로 쌓아 올려 튼튼한 탑을 새로 짓자는 계획도 제시되었지만, 반대 의견이 워낙 많았다. 그래서 사탑 그대로 보존할 방법을 찾고 있다. 피사의 사탑은 2001년 6월 16일, 11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다시 공개되었고 2001년 12월 15일부터 관광객 출입이 허용됐다
피사의 사탑
사탑은 원통형 종탑으로, 8층 구조인 탑 안쪽은 지름이 7.7m인 빈 구멍으로 되어 있다. 맨 위층에는 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각 층에는 원주로 콜로네이드 회랑을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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