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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항일운동 큰별 김좌진·한용운 고향 '홍성'

by 까망잉크 2019. 2. 3.

 

 

3.1운동 100주년… 항일운동 큰별 김좌진·한용운 고향 '홍성'

을사늑약 항거 1906년 홍주성 전투, 전국 의병 도화선
홍동·금마·장곡면 등에서 만세 운동, 민초들 고초 겪어
홍성군, 3월 1일 '그날의 함성' 주제로 문화·체험 행사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매년 돌아오는 3월이지만 올해는 유독 특별하게 다가온다.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洪州)다. 고려 시대부터 사용한 지명이지만 일제가 지역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1914년 ‘홍성(洪城)’으로 지명을 바꿨다고 한다.
 
만해는 1879년생에 출생했다. 1889년에 태어난 백야보다 열 살이 많다. 백야의 생가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백야의 생가는 갈산면 행산리로 6.5㎞가량 떨어져 있지 않다. 걸어서 1시간 30분 거리다. 만해와 백야가 비슷한 나이였다면 어릴 적 읍내 장터를 오가면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충남 홍성군 결성면 한용운 선생 생가 앞에 세워진 동상. 시 '님의 침묵'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홍성이 배출한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다. 신진호 기자

충남 홍성군 결성면 한용운 선생 생가 앞에 세워진 동상. 시 '님의 침묵'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백야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홍성이 배출한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다. 신진호 기자

 
만해의 생가에는 문학체험관이 마련돼 있다. 초가로 복원된 그의 생가에는 님의 침묵 액자가 걸려 있다. 방문객들이 시를 읊으며 만해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기기라는 취지다.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중략).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이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926년 발간된 시집 ‘님의 침묵’은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정한을 노래한 시이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 조성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기념관. 백야 생가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는 불과 6.5㎞가량 떨어져 있다. [사진 홍성군]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 조성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기념관. 백야 생가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는 불과 6.5㎞가량 떨어져 있다. [사진 홍성군]

 
백야 생가지는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불과 5분 거리다. 기념관에는 그의 출생부터 독립운동·암살·훈장추서 등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록과 자료가 전시 중이다. 백야는 열다섯살 때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킨 일화로 유명하다.
 
만해와 백야를 배출한 고장답게 홍성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백명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홍동면 만경산 만세운동과 갈산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 장곡독립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수많은 주민이 일제의 총칼에 스러졌다.
을사늑약에 저항하며 일제를 상대로 1906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홍주성. 전국 의병활동의 도화선이 된 홍주성 전투에서는 일제와 싸우던 지역민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홍성군]

을사늑약에 저항하며 일제를 상대로 1906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홍주성. 전국 의병활동의 도화선이 된 홍주성 전투에서는 일제와 싸우던 지역민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홍성군]

 
을사늑약에 저항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던 1905년. 그보다 앞선 1895년과 1896년 홍성(당시는 지명은 홍주)에서는 제1차 홍주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제2차 의병이 일어나는 홍주성(홍주읍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홍주성 전투는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전국적인 의병활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치열했던 전투 탓에 의병 수백 명이 숨졌다. 이들이 묻힌 곳이 홍주의사총이다. 홍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의병의 유해를 발굴한 건 1949년 무렵이다. 지금도 당시 치열했던 전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을사늑약에 저항하며 일제를 상대로 1906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홍주성 조양문. 당시 홍주성 전투에서는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홍성군]

을사늑약에 저항하며 일제를 상대로 1906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홍주성 조양문. 당시 홍주성 전투에서는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홍성군]

 
일제는 홍주성이 의병에 점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 곳곳도 철거했다. 하지만 동문인 조양문은 주민의 반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3.1운동이 전국으로 불꽃처럼 번져가던 당시 홍성군 금마면과 장곡면에서도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1919년 4월 1일 금마면 가산리 임시 연극 공연장에서 4월 4일과 7·8일 장곡면에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로 수많은 백성이 옥고를 치렀다.
 
홍성군은 지난달 25일 보훈·문화예술 등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 50명으로 구성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3월 1일 ‘1919. 그날의 함성’을 주제로 연극 공연과 만세 행진, 일제의 만행 재연 퍼포먼스, 일제강점기 금지곡 공연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906년 일제에 항거하며 홍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주민들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 [사진 홍성군]

1906년 일제에 항거하며 홍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주민들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 [사진 홍성군]

 

김석환 홍성군수는 “불의에 분노했던 자랑스러운 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홍성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선열의 고귀한 뜻과 숭고한 정신을 재조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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