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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누가 광화문을 흔들었나

by 까망잉크 2019. 2. 2.

 

[아무튼, 주말] 정도전이 그은 조선의 축… 누가 광화문을 흔들었나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

 

    입력 2019.02.02 03:00 | 수정 2019.02.02 08:19

    [재조성 논란 광화문 광장 역사]

    [재조성 논란 광화문 광장 역사]
    서울역사박물관에 모형으로 재현한 육조거리.
    "서울에는 동대문으로부터 서대문까지 동서로 서울을 가르는 대로와 이 대로로부터 남대문을 향해 뻗어 있는 대로가 있다. 이 두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부터 경복궁을 향해 폭 55m의 가장 넓은 대로가 있다. 한국에서 사시사철 언제나 정비되고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유일한 도로이다."

    서울 지리가 익숙하다면 떠오르는 공간이 있을 법하다. 광화문 앞 세종로. 그런데 요즘 얘기가 아니다. 영국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1894~1897년 한국을 여행하고 쓴 책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살림, 이인화 역)'에 나오는 대목. 세종로 자리에 있던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묘사한 부분이다.

    1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인 눈에나 외국인 눈에나 광화문은 비범한 공간이다. 요즘 이곳이 뜨겁다. 서울시가 지난달 21일 발표한 광화문광장 재조성 공모 당선작 때문이다. 당선작 '딥 서피스(Deep Surface)―과거와 미래를 깨우다'(설계자 진양교·김영민·성낙일·김희진)의 핵심은 광장 지상을 비우고 주변부와 지하를 볼거리로 채운다는 것. 하지만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옮기는 문제와 촛불을 형상화한 바닥 장식이 역사성·정파성 논란을 일으켰다. 행정안전부에선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부지를 침범·훼손한다"며 반발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주무대였다. 때로 서울이란 도시의 사회적·정치적 뇌관이 된다. 광화문광장 자리에 깃든 역사를 살펴봤다.

    조선의 뼈대…육조거리

    [재조성 논란 광화문 광장 역사]
    6·25 때 파괴된 광화문. / 조선일보DB
    조선 개국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어느 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궁궐을 지을지 고민했다. 국사(國師)인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개국공신 정도전은 백악(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팔을 들어줬다. 백악산 기슭 명당에 경복궁을 세우고 삼각산(북한산)과 관악산을 남북 축선(軸線)으로 삼았다.

    이 축선을 따라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부터 황토현(黃土峴·현 세종대로사거리)까지 쭉 뻗은 '육조(六曺)거리'를 만들었다. 길 좌우로 이·호·예·병·형·공조의 육조 관아를 배치해 나온 이름. 지금의 세종로에 해당하는 곳이다. 광화문광장 프로젝트 때 육조거리 복원 이슈가 늘 나오는 배경이다. 이번 당선안 설계자인 진양교 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교수)도 "경복궁-광화문-육조거리는 가장 중요한 국가 상징 축인데 껍질만 남아 있었다"며 "이를 제대로 잡는 게 우리 안의 핵심"이라고 했다. 육조거리 폭은 51~53m 정도. 지금 세종로(폭 100m)의 절반쯤이었다. 왕궁으로 통하는 길이었지만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는 왕과 백성이 만나는 광장 역할도 했다.

    일제가 제일 먼저 손댄 국가 상징

    [재조성 논란 광화문 광장 역사]
    1968년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하는 모습. / 서울시
    조선 왕조의 심장부인 만큼 일제강점기 일본이 가장 먼저 손댄 지역이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육조거리부터 지웠다. 1914년엔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1926년 대못 박듯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는데 조선신궁이 있던 남산 방향을 향하게 했다. '북한산-경복궁-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축선을 깨고 '총독부-경성부청(현 서울시청)-남산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새 축선을 만든 것이다.

    도심 풍경도 완전히 바뀌었다. 육조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장랑(長廊·대궐문이나 대문 좌우로 죽 늘어서 붙어 있는 집채)을 뜯어내면서 서울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건축가 황두진씨는 "육조거리는 한옥 장랑이 도로와 필지가 만나는 부분에 들어섰는데 일제강점기엔 장랑이 담장으로 대체되고 근대식 건물이 그 안에 섬처럼 들어서게 됐다"고 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광화문통은 세종대왕의 이름을 따 세종로로 바뀌었다.

    1960~80년대 도시화 아로새긴 광화문

    1960년대 급격한 도시화의 출발점도 광화문이었다. 6·25 이후 폐허가 됐던 세종로에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은 1961년 준공된 광화문 '유솜(USOM· 미국대외원조기관) 쌍둥이 빌딩'.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이후 1961년 시민회관(1972년 화재로 철거, 1978년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 신축), 1962년 광화문 전화국, 1970년 정부 종합청사, 1981년 대한교육보험빌딩(현 교보빌딩), 1984년 국제통신센터(현 KT 광화문지사) 등이 세워져 지금의 얼개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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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전후 경복궁광화문육조거리. 양쪽으로 관아가 있고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1896년 펴낸 Otto E. Ehlers의 책 ‘Im Osten Asiens’에 실린 사진을 재촬영한 것.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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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조선총독부 건물(1926년 완공)과 ‘광화문통’으로 이름이 바뀐 대로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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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 시절 세종로지하도(광화문지하도) 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에 보 이는 가장 높은 건물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이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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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첨탑이 철거된 후 1996년 본격 철거에 들어간 옛 조선총독부 건물.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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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때 광화문 길거리에서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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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고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섰다.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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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발표한 광화문 광장 재조성 설계 당선작 조감도. 광장을 비우고 지하를 채운다는 구상이다. / 서울시
    이때 서울시 공무원으로 도시 계획을 담당했던 손정목(2016년 작고)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특히 1966년을 "서울의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이 끝나던 1966년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이 불도저식으로 서울을 바꿨기 때문이다. '도시는 선이다'는 구호를 내걸고 도로부터 정비했다. 첫 작품이 1966년 9월 준공한 세종로지하도(광화문지하도)였다.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1966)'엔 당시 개발 풍경이 고스란히 나온다. '서울로 전임해온 젊은 시장은 부임하자마자 전 시장이 얼마나 일을 안 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였는가…일부러 강조나 하듯이 우선 교통난 완화에 세종로, 미도파 지하도 공사 착수, 도로 확장 공사가 사방에 착수되었다.'

    1960~1970년대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서울 도시 계획에 참여했던 건축가 김원이 당시 일화를 꺼냈다. "1967~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 지시로 여의도 신도심 개발 계획안을 만들었다. 여의도를 신도심으로 파리의 라데팡스처럼 개발하고, 광화문은 역사 도심으로 차 없는 보행자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해외 사정에 밝지 못하고 무조건 개발을 외치던 때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0~1980년대 코리아헤럴드 사진기자, 건축 사진가로 활동했던 임정의씨는 광화문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록했다. 대통령 취임식, 외국 정상 방문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세종로 한복판에 섰다. 임씨는 "그때를 떠올리면 1971~1982년 있던 '광화문 아치'부터 생각난다"며 "특히 아치 아래로 펼쳐진 육영수 여사 운구차 행렬을 찍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크고 작은 풍경 변화는 있었다. 최근 이전 논란에 휩싸인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전체 높이 17m, 조각가 김세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에 세웠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2009년 광화문광장(너비 34m, 길이 557m) 개장과 같은 해 세종대왕상 설치(조각가 김영원 작품)도 굵직한 변화다.

    광화문의 힘을 만들어낸 건 결국 사람이다. 차가 점령했던 거리에 사람이 몰린 결정적 계기가 2002년 한·일월드컵 길거리 응원전. 이 공간이 품은 에너지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는 "광화문이 시위의 메카처럼 된 데는 조선시대 왕 행차 때 백성들이 읍소하던 전통이 깔려 있다"며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서가 이어진 데다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광장에 모이려다 보니 4·19혁명, 효순이·미선이 집회, 촛불 집회 등의 무대가 됐다"고 했다.

    [재조성 논란 광화문 광장 역사]
    1911년 광화문 앞 해태상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만 파자" vs "확실히 고치자"

    10년 만에 재조성되는 광화문광장을 향한 시선은 엇갈린다. 사진가 임정의씨는 "도시에도 '휴먼 스페이스'가 중요한데 지금 광화문광장은 썰렁하고 너무 인간미가 없다. 헐렁해서 1960~70년대보다 더 황폐한 느낌"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임씨는 "자꾸만 뒤엎으려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놔뒀으면 좋겠다. 그것도 역사"라고 했다. 반면 건축가 김원씨는 "광화문은 우리 근대사의 현장과 그 증인, 심장이자 척추이자 머리인 존재"라며 "앞으로 50년 뒤 세계적인 명소가 되려면 과감히 전체 를 비워내고 차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건축과 풍수와 권력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통합적인 관점을 강조했다. "조선시대엔 청와대 터(왕이 농사지으며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곳), 경복궁(정치 공간), 광화문(백성과 소통 통로)을 하나의 유기체로 봤는데 지금은 단절돼 있다"며 "이점에 주목해 재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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