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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애꾸가 내일을 보다

by 까망잉크 2019. 2. 12.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애꾸가 내일을 보다.

흉년이 들어도 지독한 가뭄에도
천석꾼 황첨지는 빙긋
손윗사람 하대하는 안하무인이지만
반미치광이 백가는 깍듯이 모셔
어느날 동학란 중 도망쳤다가
붙잡혀 광장에 꿇어앉아있는데…

흉년이 들면 농사꾼들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지만 천석꾼 부자 황 첨지는 빙긋이 웃는다.

지난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보리는 싹도 나지 않았고 콩은 겨우 난 싹이 메말라 고개를 꺾었다.
논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모가 하얗게 쪼그라들었다.

황 첨지네 논밭이라고 비가 뿌렸을 턱이 없지만
그는 희희낙락했다. 그 전해에 추수해놓은 보리섬, 콩섬, 나락가마가 곳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 첨지는 곡식을 내다 팔지 않는다.
기다리면 더 큰 횡재수가 줄줄이 엮여 들어온다.

보릿고개까지 갈 것도 없이 동짓달에 벌써 양식이 떨어진 집이 속출하면 황 첨지는 비싼 장리쌀을 놓는다.

집집이 우선 굶어 죽지 않으려고 천수답이며 밭뙈기를 담보로 황 첨지한테서 곡식을 빌려다 먹으면 십중팔구
그 논밭은 황 첨지에게 넘어간다.

황 첨지는 장사에도 밝아 새우젓 배를 통째로 샀다가 새우젓이 달릴 때 야금야금 내놓아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또 누구에게든 안하무인이다.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손윗 사람에게도 하대를 하고 여염집 부녀자도 하녀 취급한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단 한사람은 손아래 반미치광이 백가다. 백가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부녀자들 이목도 두려워 않고 노상방뇨를 하고 주막에서 외상술 안 준다고 독을 깨고 평상을 엎는다.

그 뒷수습은 언제나 황 첨지가 한다. 아이들도 돌팔매를 던지는 개차반 백가를 황 첨지는 백 대사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신다.

백가는 생김새도 볼품없다.
덩치도 쪼끄마한 데다 애꾸눈엔 안대를 차고 박박 얽은 곰보에 염소수염을 달고 쭈그렁 갓에 두루마기에는 땟국물이 흐른다. 단 하나 성한 곳은 남은 눈이다.

쏘아보는 눈빛엔 광채가 빛난다. 그에게 남다른 예지력이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황 첨지다.

어느 날 황 첨지네 드넓은 마당에서 타작이 한창인데 백가가 나타나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시더니 타작을 멈추고 설거지를 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곧 폭우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구름 한점 없는 이 화창한 가을날에 폭우라니,
백가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한잔 얻어 마셨으면 빨리 꺼져라.”

황 첨지가 백가를 쫓아내고 나자 산 너머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져 동네 개울이 나락으로 꽉 찼다.

모두가 떠내려가는 나락을 막느라 야단인데 멍하니 서 있던 황 첨지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 아랫동네 길가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백가에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백가는 재밌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황 첨지가 새우젓을 매점매석하여 큰 이문을 남긴 것도 백가의 귀띔이고, 지난 가을에 소금을 천가마나 사놓았 다가 봄에 곱절에 판 것도 백가 덕이고, 안동포를 싹쓸 이했다가 떼돈을 번 것도 백가의 앞날을 보는 눈 덕택 이다.

어느 날 백가를 사랑방에 모셔놓고 황 첨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사님, 장삿거리가 없습니까?”

백가는 창을 열고 하늘을 보더니 “만냥만 내놔” 한다.

황 첨지가 눈을 크게 뜨고 “만냥이나…?” 했지만 여태 백가 덕에 번 돈이 그뿐이랴. 만냥을 받아든 백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얼마 후 동학란이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더니 이곳에도 들이닥쳤다.

탐관오리들이 줄줄이 묶여 나오고 뒷산으로 도망쳤던 악덕지주 황 첨지도 동학군에 붙잡혀 광장에 꿇어앉았다.

이때 소작농들이 몰려나와 외쳤다.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되오. 황 첨지 어른은 우리에게 은덕을 베풀었소.”

돌에 맞아 죽을 줄 알았던 황 첨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풀려났다.

만냥을 받아든 백가가 황 첨지에게 원한을 품은 집을 찾아 다니며 황 첨지 이름으로 전대를 하나씩 안겨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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