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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연산군

by 까망잉크 2019. 3. 19.

연산군

 

 


불행의 씨앗을 품고 왕위에 오르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에 성종과 윤기무(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융(小隆)이고, 1483년(성종 14)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성종은 원자의 모후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도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어린 원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자 융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세자 융과 정현왕후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 성종 역시
제왕으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세자를 미덥지 않게 여겼다.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역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손자인 연산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은 허침(許琛), 조지서(趙之瑞), 서거정(徐居正)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연산군은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부왕인 성종은 이러한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 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해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두우냐." 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 《연산군일기》 권 63, 연산군 12년 9월 2일

성종은 세자의 스승들에게 세자를 더욱 엄격하게 가르치라고 했다. 그러나 스승들의 권계(勸戒)는
연산군의 반발심만 키울 뿐이었다. 유난히 더 엄격했던 조지서(趙之瑞)는 특히 미움을 사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화를 당하기도 했다.

성종의 마음에 차지 않는 세자였어도 연산군은 큰 풍파 없이 자리를 보전했고,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 이때 연산군의 나이 19세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를 당시 왕실에는
대비만 두 명이 있었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와 성종의 비인 정현왕후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들의
섭정 없이 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집요하고 거친 면이 있었는데, 왕위에 오른 후 이러한 성격이 부각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때마다 연산군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은 어김없이 화를 당했다. 특히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모두 알고 나서 그와 연루된 인물들이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유교적
통치이념에 입각해 군주로서의 자격을 논한 사람들 역시 죽임당하는 등 연산군 즉위 후 조정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신승선(愼承善)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1명의 후궁에게서 2남 1녀를 더 두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에 올랐던 신씨는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폐비되었으며, 거창군부인으로 위호가 강등되었다.

유교적 통치이념을 거부한 파격 군주

연산군은 조선왕조의 어떤 왕과도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 윤리를 거부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유교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신료들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사림들과는 더욱 갈등이 심했다.

사실 조선은 왕권 국가이기는 했지만 그 왕권을 지탱해 주는 힘은 양반관료에게서 나왔다. 반대로 왕권을 견제하는
것도 양반관료였다. 그러므로 조선의 정치 체제는 양반관료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양반관료들은 엄연히 왕의 신하였지만,
때로는 왕권을 능가하는 발언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들조차 신료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이러한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 연산군은 왜 유교적 통치이념을 거부했을까? 유교적 통치이념에서는 왕의 '수신(修身)'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교적 이념을 중시하는 양반관료들은 툭하면 왕의 언행을 비판하거나 훈계하려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연산군은 관료들이 높은 학식을 자랑하며 왕을 가르치려고 드는 태도에 염증을 느꼈다.

이러한 연산군의 성향은 집권 초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성종이 이룩한 태평성대의 분위기를
이어 가며, 바른 정치를 펼쳤다. 성종 말기에 형성된 향락과 퇴폐 풍조를 바로잡고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했다.
또한 민생을 돌보고 국방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비록 그 자신의 학문적 성취는 높지 않았지만 사가독서 제도를
마련하고,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등 학문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림파들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훈계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왕이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두 번의 사화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자신을 귀찮게 괴롭히던 사림들을 제거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사림은 성종 대를 거치면서 훈구 세력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부패한 훈신들을 탄핵하고, 왕에 대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훈신 세력들에게는 이들 사림이 눈엣가시였다. 훈신들은 왕이 사림에게 염증을 내는 것을 기화로
그들을 몰아낼 궁리를 했다. 사화를 일으킨 것이다.

연산군 조에는 두 번의 사화가 발생하는데, 첫 번째가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훈신인
이극돈(李克墩), 유자광 등이었다. 이들은 사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극돈은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라감사로 재임하던 시절의 비리를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했던 것이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그 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이 일로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극돈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의 당상이 되었다. 실록에 올릴 사초를 살펴보던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올려놓은 것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을 일시에
제거할 만한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김종직이 누구인가?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수장이 아닌가. 당시 김종직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를 걸고넘어지면 그의 제자들을 줄줄이 엮을 수 있었다.

〈조의제문〉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를 애도(弔)하는 글(文)이다. 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댄 것이었다. 사림들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유교적 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조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직계 자손인 왕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극돈은 이러한 사실을
실록청 총재관 어세겸(魚世謙)에게 알리고 연산군에게 아뢰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어세겸이 머뭇거리자
이극돈은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은 세조 시절 이시애의 난 때 발탁되었는데, 예종 조에는 남이를 고변해 공신에 책봉된 대표적인 훈구파였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에게 감정이 있었다. 유자광이 함양 지방을 유람할 때 객사 현판에 자신의 시를 걸어 두었는데,
후일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현판을 불태워 버린 일이 있었다. 유자광은 분했지만 성종의 신임을 받고 있는
김종직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이극돈의 이야기를 들은 유자광은 김종직이 이미 죽었지만 이번 기회에
지난날의 치욕을 앙갚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자광은 곧바로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기를 "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해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이 문집 및 판본을 다 불태워 버리고 간행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이러한 마음 아픈 일이 있단 말이냐. 의의(議擬)해 아뢰도록 하라. 국가에서
종친에게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니 그 은혜가 막중하거늘, 이총(李摠)은 조관(朝官)들과 결탁해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만약 종친이라 해서 그 죄를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여러 종친이 어찌 경계할 줄을 알겠느냐.
심문을 하도록 하라." 했다.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5일

안 그래도 귀찮은 사림들을 한 번 혼내 주고 싶었던 연산군에게 유자광의 고변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 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고, 이를 사초에 기록한 김일손은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또한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 수많은 사림들도 파당을 만들어 선왕(세조)을 무고했다는 죄를 물어 참형을 당했다.
이것이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성종 조 이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던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었고, 조정에는 연산군에게
아부하며 치부하기에 바쁜 무리들만 남았다. 비판과 견제를 담당할 사람이 사라진 조정에서 연산군은 그야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연산군 조의 두 번째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그러나 이때는 사림보다
오히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에 관여한 다수의 훈신들이 화를 입었다. 이 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임사홍(任士洪)과 신수근(愼守勤)이었다. 이 두 사람은 훈구파도, 사림파도 아닌 이른바 궁중파였다. 임사홍은
예종, 성종과 사돈을 맺은 외척이었지만 간교한 성격 때문에 크게 출세하지는 못하고 있다가 연산군을 만나면서
기를 펴기 시작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왕비인 신씨의 오빠였다. 그는 임사홍과 결탁해 연산군
주위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갑자사화의 불씨를 당긴 것은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어머니를 통해 폐비가 사사된
내막을 소상히 고했다. 연산군은 즉시 관련자들을 색출해 문책하라고 명했다. 여기에는 무오사화 이후 위축된
사림파를 따돌리고 득세하고 있던 훈구파들이 대거 연루되어 있었다.

연산군은 이들을 한 번쯤 크게 혼내 주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당시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연산군은 훈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공신전(功臣田)을 빼앗으려고
했고, 훈구파들이 크게 반발했다. 한 번 마음에 안 들면 기어이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연산군이었기에 임사홍의
고변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결국 갑자사화로 폐비 윤씨의 사사에 찬성했던 훈구파 윤필상(尹弼商), 이극균,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등이 사사되었고, 한치형(韓致亨),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沈澮)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이 밖에도 홍귀달, 심원(沈源), 이유녕(李幼寧), 변형량(卞亨良) 등 다수의 사림도 화를 입었다. 갑자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연산군이 억울하게 죽은 어미의 한을 풀어 준 복수극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연산군과 궁중파가
권력 독점을 위해 벌인 정치극이었다.

한편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은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폐비 윤씨의 사사에 빌미를 제공하고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혐의로 성종의 후궁인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 할머니인 인수대비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록은 연산군의 잔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임금이 성을 내어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죽이니, 소혜왕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했다.
- 《연려실기술》 권 6, 연산 조 고사본말
이로써 연산군은 자기 분에 못 이겨 부왕의 후궁들과 친할머니까지 제 손으로 죽인 패륜아가 되었다.

역사에 기록된 연산군의 학정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권력을 독점한 연산군과 궁중파들의 학정은 날로 심해졌다. 먼저 연산군은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 언로(言路)를 막았다. 또한 정치 논쟁을
막기 위해 경연도 폐지했으며,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기생과 어울리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자기의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 없이 죄를 물어 참형에
처했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직언을 한 환관 김처선(金處善)은 직접 활을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간 '처(處)' 자를 쓰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
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라고 바꾸기도 했다.

특히 연산군은 장녹수(張綠水)라는 궁녀에게 빠져 놀아났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해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했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해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해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해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 전답, 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해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金孝孫)은
그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이를 수 있었다. - 《연산군일기》 권 47, 연산군 8년 11월 25일

그러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궁인과 기생은 물론이고 여염집 아녀자들까지
거침없이 희롱했으며, 심지어 친족과 간음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불사했다. 또한 전국에서 운평(가무를 담당하던
기생)을 뽑아 대궐에 들여 '흥청(興淸)'이라고 하고, 밤낮으로 풍악을 울렸다. 여기에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한 후 금표를 세워 사냥터로 삼았다.
만약 여기에 함부로 들어가면 조리를 돌리게 했다. 수리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궁실을 넓히고,
강가나 시냇가에 높은 누각과 정자를 지어 수시로 오가며 놀았다. 또 놀기 좋게 땅을 고르거나 물길을 바꾸고
큰 연못을 파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토목공사에 백성들이 징발되어 고통이 컸으며
국가 재정도 거덜 났다.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여기저기서 언문 투서가 나붙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아예 언문금지령을 내렸다. 이처럼 연산군의 학정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물론 대부분의 기록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반정 세력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을 몰아내려면 그만 한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왕도 쫓겨난다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반란군이 궁궐로 향했다. 연산군의 행태를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었던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을 주도했다.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도망가기에 바빴다. 아무도 연산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국왕도 쫓겨난다. 결국 궁궐에 들이닥친 반정 세력들은 대비인 정현왕후의 재가를 얻어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종반정이 신하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앞선 조선 역사에서는
태종이나 세조처럼 형식이야 어찌 되었든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왕위를 찬탈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 자신의 뜻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폐출한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왕을 몰아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중종은 반정 세력이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궐 밖 사저로
군사를 보낼 때까지 자신이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권 국가인 조선에서 신하가 왕을 몰아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의 양반관료 체제가 얼마나 견고한 조직인지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꿈꿨던 연산군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양반관료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었을망정 조선의 양반관료 체제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고, 역으로 왕을 갈아치웠다.

연산군이 만약 현명한 군주였다면 훈구파와 사림파 두 세력이 적당히 서로를 견제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력 균형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다가, 경우에 따라서 한쪽 편을 들어주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정국을 이끌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러한 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전권을 휘두르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이 아주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도 잘 짓고 머리도 좋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관련된 궁중의 권력 투쟁에 연루되어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실패한 군주는 패륜아로 몰리게 마련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겨우 31세였다. 연산군은
왕의 묘호(廟號)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의 폐출은 모든 양반에게 인심을 잃으면 왕도 쫓겨날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연산군의 죽음 이후 그의 식솔들 역시 궁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시 방학동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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