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희망의 사람들] 백령도 아픈 근대사에 희망 심은 이름, 이젠 전설이 되다
북한 바라보이는 서해 최북단 절해고도
1960년 미국인 부영발 신부의 노력으로
당시 미국서 최신 시설 공수해 병원 건립
입력 : 2021-11-04 04:06/수정 : 2021-11-04 04:06
에드워드 모펫(한국명 부영발) 신부가 인천 옹진군 백령도에 1960년 세운 백령성당이 지난달 말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부 신부는 이곳에 병원 고아원 양로원 결핵병동 등을 세워 주민들에게 ‘섬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
‘심청전’을 쓴 조선시대 작가는 저 바다에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져 남북으로 갈릴 줄 알았을까.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판 뒤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인당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누각 ‘심청각’이 있다. 지난달 말 찾아간 심청각은 문이 굳게 잠긴 채였다.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에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건립됐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방문객이 크게 줄어든 탓인 듯했다.
사곶해변
인천에서 배로 4시간 걸려 도착한 백령도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모래가 고와 비행기 활주로로 쓰였다는 사곶 해변, 자갈이 콩알만 해 붙여진 콩돌 해변, 수백년 된 연화리 무궁화, 점박이 물범 등 천연기념물만 여러 개다. 명승으로 지정된 기암절경 두무진도 있다. 그 풍경이 평화로워 보여 겨우 12㎞ 떨어진 바다 건너 육지가 북한 땅 장산곶(황해도 용연군)이라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
두무진
렌터카 회사를 운영하는 주민 손정서(68)씨는 “심청각이 선 자리에 과거 미군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곳에 올라가지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백령도는 광복 당시에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으나 6·25전쟁 중 미군과 한국군이 점령하면서 휴전 후 남한에 편입됐다. 사곶 해변은 1970년대 초까지 백령도에 주둔한 미 공군이 활주로로 이용했다.
백령도 미군 이야기가 세월이 흐르며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또 다른 이야기도 잊히고 있다. 아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민 5000명 남짓의 백령도에 30병상 이상을 갖춘 백령병원이 탄생한 스토리다. 백령병원은 1960년 ‘김안드레아병원’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을 땄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이 병원, 아니 백령도에 얽힌 근대사를 이야기하려면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인 에드워드 모펫(1922∼1985·사진), 한국명 부영발(傅永發) 신부다. 그는 48년 사제 서품을 받고 메리놀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 광시성에 배치돼 선교사역을 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감형을 받고 56년 본국으로 추방됐다. 58년 한국에 온 부 신부는 미 공군 오산기지 군종신부로 재직하다 백령도 주둔 미 공군기지를 자주 왕래한 게 계기가 돼 59년 인천 감목대리구로부터 백령도 성당을 설정 받아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당시 백령도엔 3만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부 신부는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병원 양로원 고아원 유치원 공민학교 결핵병동 등을 세워 사회사업을 했다.
놀라운 것은 병원의 건립이다. 가톨릭 신자이던 백령면장으로부터 부지를 양도받아 최신 시설을 갖춘 가톨릭의과대학 부속 병원이 60년 들어섰다. 주민 김형률(73)씨는 “당시 백령도에는 미국 등지의 가톨릭 신자들이 후원한 밀가루, 강냉이 가루, 옷 등 구호물품이 많이 들어왔다”면서 “부 신부는 주민에게 더 절실한 의료 지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병원을 세웠다”고 했다.
부 신부는 의료시설은 물론 집기와 건물 외벽까지 미국의 한 병원을 통째 수입해 백령병원을 지었다고 한다. 70년대 초반 군의관으로 와서 7개월 근무했다는 이두익 백령병원장은 “그때 소파에서 미국 동전이 나온 걸 보면 소파까지 미국에서 통째 가져온 것”이라며 웃었다. 육지에서 배로 18∼24시간 걸린다는 섬에 의사 4명, 간호사 1명, 약사 1명을 갖춘 번듯한 병원이 운영됐다. 진료가 무료나 싼값에 제공되면서 멀리 육지에서도 이 병원을 찾았다.
미군의 주둔, 부 신부의 활약 등으로 절해고도 백령도는 60년대부터 문명의 혜택을 누렸다. 김씨는 “미군부대가 있어서 60년대 초반부터 전기가 들어왔고 TV를 보는 집도 있었다. 부 신부 덕분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고 회상했다.
가톨릭 인천교구사는 “에드워드 부 신부가 눈부신 활약을 하여 주민들은 이 섬의 아버지로 부른다”고 기록한다. 부 신부는 73년 환속했지만 그가 남긴 백령성당과 백령병원 등은 현재까지 남아 주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부 신부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하버드대 동문이어서 백령도의 안전이 지켜졌다거나 한국 권력층과 가까워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리에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돈다.
부 신부의 활약상을 증거하는 초기 목조 병원은 안타깝게도 화재로 전소됐다. 74년 그 옆에 대한적십자사가 인수한 백령적십자병원이 새로 개원했고 백령길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14년 현재 자리에 인천시의료원백령병원이 신축됐다. 옛 병원은 청소년수련원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백령도는 활주로로 사용된 사곶 해변, 자갈이 콩알만 한 콩돌 해변, 수백년 된 연화리 무궁화나무, 점박이물범, 기암괴석의 두무진 등 천연기념물과 명승이 여럿 있지만 해안의 상당 부분에 철책이 세워져 접근이 통제돼 있다. 사진은 백령도 해안 철책.
백령도 해변에는 곳곳에 철조망이 있다. 미군부대 철수 후 75년 말부터 안보 차원에서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매설했다고 손씨는 기억한다. 그는 “이전에는 베트남 전쟁을 다녀온 사람이 가져온 야외 전축을 틀어놓고 친구들과 해안가에서 춤추며 놀던 시절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그런 걸 꿈도 꾸지 못한다. “관광객이 오고 싶겠어요. 어느 해변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지정된 곳만 갈 수 있으니….” 그의 말에서 주민들의 소망이 묻어났다.
후원: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백령도=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사진 조현택 사진작가 yosoh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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