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무임금 더 많았던 궁궐…‘뒷돈 高소득’에 취업 경쟁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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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지식카페 - ② 다양했던 고용 구조
녹봉 받는 문무관직 5605개 중 정규직 2495개·계약직 3110개… 나머지 직책은 재정부족에 돈도 못받고 일해
궁중 행사·지방관 통행세 등 부정한 방법으로 월급보다 더 큰 수입 올려… 직종 구분 없는 부패 행각 나라에선 묵인
조선시대에도 직장 생활에서 정규직과 계약직이 존재했다. 물론 조선인들이 선호하는 자리도 요즘 사람들과 다름없이 정규직이었다.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인 홍문관의 관원이나 선전관들도 모두 정규직이다. 하지만 궁궐 안에는 의외로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이 훨씬 많았다. 조선시대엔 계약직을 체아직이라고 했는데, 조선의 관직은 정규직보다는 체아직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궁궐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은 왜 그렇게 계약직을 많이 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돈이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의 관직은 크게 실직과 산직으로 구분된다. 실직은 실무가 있는 직책이고, 산직은 벼슬만 주어지고 근무처가 없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이 때문에 실직은 직장이라 할 수 있지만 산직은 직장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직이라고 해서 모두 월급을 받는 직장인 것도 아니다. 실직도 녹봉 즉, 월급을 받는 녹관과 월급이 없는 무록관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당연히 무록관보다는 녹관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녹관이 모두 똑같은 조건으로 근무하는 것도 아니다. 녹관 중에도 정직과 체아직이 있다. 정직이란 요즘 말로 정규직이고, 체아직은 기간제 또는 계약직이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무관직 수는 총 5605개였다. 물론 그 모든 관직에 양반들이 진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중에서 체아직, 즉 계약직이 아닌 정직은 2495개뿐이었고, 나머지 3110개는 체아직이었다. 2495개의 정직 중에서 문관직은 1779개, 무관직은 716개였다. 조선 양반들은 우선적으로 2495개의 정직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직장 선택의 관건이었다. 만약 이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임시직이나 계약직을 택해야 했다.
그런데 체아직이라도 얻으면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체아직은 녹봉이라도 있었지만, 아예 녹봉도 없는 직장인들도 있었다. 아니, 녹봉이 없는 직장인이 녹봉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록관, 서리, 사령들이 바로 그들이다. 무록관은 신분이 양반이고 품계까지 얻었지만, 녹봉은 없는 관리를 말한다. 궁궐 안에 있는 관원들 중에 무록관으로 지정된 양반 관리들이 생각보다 많다. 교서관, 사옹원, 상의원, 전설사, 전연사, 내수사 등에 속해 있는 정3품 제거와 정4품 제검, 정5품 별좌, 정6품 별제, 정8품 별검 등의 관원들은 모두 월급 없는 무록관이었다.
월급조차 없는 직장인들이 궁궐 안에만 해도 부지기수였는데, 앞에서 언급한 무록관은 물론이고 서리, 사령들도 모두 월급이 없었다. 그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월급을 받는 유록관의 몇 배나 됐다. 신기한 것은 월급이 없는데도 이들은 자원해서 궁궐에 들어와 일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도대체 그들은 왜 월급도 받지 못하는 직장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월급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
사실 조선의 관리들은 대부분 월급보다 뒷구멍으로 버는 수입이 훨씬 많았다. 특히 체아직과 무록관, 서리 등은 아예 공공연히 뒷돈을 챙겼고, 나라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묵인해줬다. 오히려 직위를 이용해 부정을 저지르도록 나라에서 인정해줬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형태로 뒷돈을 챙겼는지 궁궐 별감과 그 아래에 있는 사령들의 행태를 통해 살펴보자.
궁궐에 근무하는 체아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별감이다. 별감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다면, 임금이 행차할 때 붉은색이나 노란색의 화려한 도포와 갓으로 치장하고 맨 앞에 서서 어가를 시위하는 존재를 떠올리면 된다. 이들은 왕이 행차하는 곳엔 언제든지 맨 앞에 서는 자들이다. 궁중의 각종 행사나 국왕의 종묘제사, 문묘참배, 선대왕릉 참배 등 모든 궁중 행사에 그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 까닭에 숫자가 꽤 많은 편이다. 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별감을 통칭해 흔히 내시별감이라고 하며 별감의 숫자는 대개 100명 안팎이었는데, 많았던 때는 150명을 넘기도 했다. 이들의 벼슬은 종9품에서 종7품까지 주어졌는데, 대개 900일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하지만 900일을 넘겨도 몇 차례에 걸쳐 계약을 연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벼슬은 종7품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별감이 매우 화려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들의 차림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적어도 그들은 옷차림에 있어서만큼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별감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별감의 직책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점마별감, 내직별감, 대전별감 등등 근무 장소와 임무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모두 달랐다. 점마별감은 각도의 목장에서 기르는 말을 점고(點考), 즉 숫자를 세고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복시 별감이다. 사복시는 내사복시와 외사복시가 있는데, 내사복시는 경복궁 영추문 안쪽과 창경궁 홍문관 남쪽에 있었고, 외사복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었다. 사복시는 수레, 말, 마구, 목축을 관장했는데, 내사복 별감은 궁궐에서 사용하는 말과 궁궐을 드나드는 수레나 말을 관리했다.
내직별감은 다방별감 또는 사준별감이라고도 하는데, 다방(茶房)은 궁궐에 필요한 채소와 약초, 꽃, 술, 과일 등을 재배하고 공급하는 기관이었다. 다방은 훗날 내직원으로 개칭됐는데, 그래서 이곳의 별감을 내직별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직원은 다시 사준원으로 개칭돼 사준별감이라고도 했다. 대전별감은 임금을 모시는 별감인데, 별감 중에서 임금과 가장 밀접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전 외에도 중궁전, 세자궁, 후궁처소, 세손궁, 무수리간, 세수간 등에도 별감이 배치됐다.
이렇게 궁궐 안에 근무처를 두고 있는 별감들을 내시별감이라고 하는데, 그들이야말로 별감 중에 가장 요직을 차지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별감의 꽃으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화려한 차림새 못지않게 수입도 짭짤한 편이었다. 체아직이라 녹봉은 많지 않았지만, 은근히 뒤로 버는 수입이 좋았기 때문이다. 별감들의 수입원은 다양했다. 왕실 사람들의 피접이나 국왕의 능행, 왕실의 혼사, 제사 등이 있으면 녹봉 외에 별도의 수입을 챙기는 것은 당연했고, 궁중에 연회가 있으면 양반들로부터 일종의 궁문 통행세 같은 것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짭짤한 수입원은 궁궐을 드나드는 지방관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통행세였다. 지방에 수령으로 발령이 난 관리들은 임지로 가기 전에 반드시 임금을 배알해야만 했는데, 이때 그들은 각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일종의 통행세를 내야만 했다. 그 통행세를 거둬들이는 자들이 바로 이들 별감이었다. 이것은 궐내행하(闕內行下)라고 해 공공연히 나라에서도 허용하는 관습이었다.
별감들은 각 궁문을 지키는 사령이나 나장들을 지휘하는데, 일정 정도 이상의 통행세를 내지 않으면 아예 궁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래서 지방관들은 궁중의 각 문과 관아를 지날 때마다 거액의 통행세를 지급해야만 임금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액수는 대략 적게는 60냥에서 많게는 300냥 정도 됐다. 당시 1냥은 곧 엽전 100푼인데, 이 돈이면 쌀 3말을 사고, 포 1필을 살 수 있었다. 이를 감안할 때 300냥이면 무려 1500만 원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물론 이 돈을 지방관이 마련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것은 지방관의 임지에 사는 백성들이었다. 새로운 지방관이 발령이 나면 임지의 아전이 백성들에게 돈을 거둬서 궐내행하 비용을 마련해 상경하는 것이다.
어쨌든 별감들은 매일같이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통행세를 거둬들여 수입을 챙긴다. 물론 이렇게 거둬들인 돈을 별감들만 챙기는 것은 아니다. 별감들 중 계급이 높은 자가 상당 부분을 먼저 챙기고, 다시 그 아래 별감들이 일정 부분 챙긴다. 그리고 나머지는 별감 아래에 있는 도사령에게 내려준다. 도사령은 흔히 문지기로 불리는 사령들의 우두머리인데, 그가 별감으로부터 받은 돈의 절반 정도를 챙기고, 나머지는 아래 사령들이 조금씩 나눠 갖는 구조다.
별감들이 이렇게 거둬들이는 뒷돈은 월급보다 몇 배로 많았다. 그 외에도 별감들은 각기 근무지에 따라 챙기는 돈이 또 있었다. 그런 까닭에 궁궐 별감 자리는 비록 체아직이지만 아주 인기가 좋았다. 누군가 별감에서 물러나기만 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뒷줄을 대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양반 출신 중에서도 별감 자리를 탐내는 경우도 많았다.
궁궐 별감과 궁궐 사령들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시대는 부정과 불법, 편법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궁궐 안뿐 아니라 궁궐 밖이나 지방에도 월급 없이 관청에 근무하는 자들은 모두 직위를 이용해 부정과 협잡을 통해 얻어낸 뒷돈으로 생활했다. 나라에서 월급을 주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라가 부정과 부패를 방치하고 부추겼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 사회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로선 그런 행위를 부정이나 부패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 용어설명
체아직(遞兒職) : 조선시대에 운영된 관직 제도의 일부로 정상적으로 녹봉을 받는 정직(正職)과 달리 근무한 기간에만 녹봉을 받는 계약직이다. 궁궐에 근무하는 체아직 가운데 대표적인 직업군이 ‘별감’이다. 이들은 왕이 행차할 때 화려한 도포와 갓으로 치장하고 맨 앞에 서서 어가를 시위했다. 별감의 숫자는 대개 100명 안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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