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팍한 태종, 환관 쥐 잡듯 했고… 원칙주의자 세종은 상벌 분명히 했다
기사입력 2022.02.25. 오전 10:51 최종수정 2022.02.25. 오후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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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지식카페 - ⑥ 王들의 환관 관리Ⅰ
‘조선 건국’태조, 환관을 공신 대접하며 권력 남용 눈감아…
태종은 화나면 물불 안가려 총애하던 노희봉조차 “일 못해먹겠다”
깐깐했던 세종, 범법행위땐 지위막론 중형…‘측근정치’ 세조, 단종 신임받던 전균이 자기편에 붙자 극진한 대접
환관은 궁녀와 더불어 왕실 사람들의 생활 비서였다. 이 때문에 환관들의 직장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당연히 왕실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그런데 조선 왕들이 환관들을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었다. 태조 대에 환관의 조직이 거의 완성되었지만, 환관에 대한 대우나 관리 방법은 왕마다 조금씩 달랐고, 그런 왕들의 태도에 따라 환관의 직장 생활이 좌우되었다. 그야말로 환관들의 삶은 어떤 왕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 왕들이 환관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태조와 태종, 세종, 세조부터 살펴보자.
◇환관의 지나친 권력을 묵과한 태조 = 태조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그와 함께 조선을 건국했던 많은 신료는 환관을 멀리할 것을 주청했다. 태조 원년 7월 20일에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면 신하들은 진나라의 조고, 한나라의 홍공과 석현, 당나라의 이보국, 구사량 등을 언급하며 환관이 준동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당시 활동하던 주요 환관은 김사행을 비롯하여 조순, 이득분, 이강달, 윤상, 이광, 한계보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 때에 환관이 된 자들이었다.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도성을 쌓고 궁궐 짓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특히 김사행과 조순에게는 2품의 높은 벼슬을 내려 공신으로 대접했고, 이 덕분에 그들 환관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조순은 자기와 친한 사람이 생원 시험에 떨어지자 청탁을 넣어 부정 합격을 시키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또 당시 판서 벼슬인 호조전서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태조는 이 사실을 알고도 그를 그저 고향에 안치하고 직첩을 회수하는 정도로 벌을 대신했다. 물론 얼마 뒤에 신하들의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순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또 왕명을 출납하고 궁궐을 숙위하는 문제, 궁궐을 함부로 출입한 죄인들을 신문하는 일도 모두 환관에게 맡겼다.
이런 탓에 태조 시절엔 환관의 힘이 막강하였다. 심지어 대신들이 모여 환관에게 잔치를 열어주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태조는 자신의 환관들에게 신뢰와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원이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영화는 끝이 났다. 이방원은 태조가 가장 총애하던 환관인 김사행과 조순을 참형에 처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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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환관에겐 호랑이처럼 굴었던 태종 =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태조와 달리 환관들을 매우 엄하게 다뤘다. 태종의 이런 태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조사의의 난’이었다.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혈족인 강현 등과 더불어 태조의 복위를 꾀했고, 급기야 군대를 일으켰는데, 이때 환관 김완과 함승복이 가담했다. 김완은 당시 궁궐과 함흥을 오가며 태상왕 이성계를 문안하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완은 태조가 조사의를 통해 복위를 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의 환관이었던 그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또 함승복은 은밀히 조사의 세력과 결탁하고 조사의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오면 내응하기로 했다가 후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환관들에 대한 태종의 태도를 매우 완강하게 만들었다. 태종은 원래부터 성질이 괴팍하고 무서워 화가 나면 환관들을 쥐 잡듯 했는데, 태종이 총애하던 환관 노희봉조차 환관 일을 못해 먹겠다며 관모를 내팽개쳤을 정도였다.
태종은 환관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의 토씨 하나라도 잘못 전달하면 가차 없이 매질했고, 세자가 공부하지 않으면 세자 대신 동궁의 환관들을 끌고 가 매를 쳤다. 전균 같은 환관은 물을 어정(御井)이 아닌 다른 우물에서 길어온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태종은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고 환관들을 무섭게 몰아붙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관은 태종이 화가 나면 옆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
◇깐깐한 원칙으로 환관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세종 = 태종의 까탈스러운 성격 덕분에 세종대엔 환관들이 말썽을 부리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더구나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땐 늙은 환관들은 거의 모두 죽고 엄자치, 전균, 송중 등의 젊은 환관들뿐이었다. 세종 즉위 초에는 태종의 환관 노희봉이 있었으나 이내 죽었다. 그 때문에 궁궐 일을 잘 아는 환관이 없어 세종은 젊은 환관들만 부려야 했다. 세종 중기의 엄자치, 말기의 김득상 정도가 승전색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신임을 얻었지만, 그들 역시 함부로 권세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세종의 환관에 대한 대우는 태종보다 한층 더 깐깐했다. 환관에게 과전을 지급할 때는 임금의 특지가 내린 것 이외에는 주지 말라고 했고, 환관의 과전이 같은 급의 조정 관료보다 많지 않게 했다. 그 이전에는 대개 환관은 조정 관료들보다 많은 과전을 받았는데, 세종은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당시 조신들은 대전 환관인 승전색을 은밀히 집으로 초청하여 술을 대접하곤 했는데, 세종은 이 일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당시 도승지였던 조서로 같은 인물도 승전색이었던 이촌에게 뇌물성 술을 사곤 했다. 거기다 공공연히 이촌의 과전을 올려줄 것을 상언하기도 했다. 세종은 조신이 승전색에게 주는 술이나 과전을 높여달라는 것을 모두 뇌물로 인식하고 엄하게 질책했다.
환관들은 대궐에서 쓰는 물품을 빼내는 일도 잦았는데, 세종은 이것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물품을 빼내다가 걸린 환관에 대해서는 지위에 관계 없이 중형으로 다스렸다. 심지어 사형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전 왕들이 환관들에 대해선 온정을 베푼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환관들을 그토록 무섭게 다뤘던 태종도 환관의 잘못에 대해선 형률을 곧이곧대로 적용하지 않았는데, 세종은 일절 예외가 없었다. 원칙주의자였던 세종은 상벌이 분명하고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는 성격이었기에 범법 행위에 대해선 용서가 없었다. 다만 세종은 태종처럼 함부로 환관을 때리거나 환관들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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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도운 측근 환관만 총애했던 세조 = 문종, 단종 조를 대표하는 환관은 세종 조에 성장한 엄자치와 전균이었다. 엄자치를 매우 신임하던 문종은 그로 하여금 군기감을 내사하도록 하고 부정부패를 밝혀내 치죄하기도 했다. 단종 역시 엄자치와 전균을 매우 신뢰하여 엄자치를 영성군, 전균을 강천군에 봉군하기도 했다. 또 2품 이상의 고위 벼슬을 내려 공신으로 대우했다. 당시 어린 단종으로선 가장 믿을 만한 신하가 엄자치밖에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엄자치는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안평대군,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과 손잡고 단종의 왕위를 지키려고 애썼는데, 이 때문에 왕위를 노리고 있던 세조 세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권력을 잡은 뒤에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엄자치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엄자치는 단종이 신임하던 환관이었기에 함부로 죽이지는 못했다. 당시 세조의 측근들은 연일 엄자치를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단종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관노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엄자치는 단종의 배려로 제주 관노로 가게 되는데, 엄자치가 제주로 가는 도상에서 죽는 바람에 참형은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자치가 살아있었더라면 필시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죽였을 것이다. 실지로 단종이 왕위에 있는 중에도 세조의 측근이었던 대사헌 최항은 엄자치가 죽은 줄도 모르고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단종의 측근 환관이었던 전균은 엄자치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일찌감치 대세를 파악하고 세조 편에 붙었다. 그 덕분에 그는 세조가 권력을 잡아 영의정에 오른 직후에 수충 협찬 정난공신에 올랐다. 물론 판내시부사 자리도 그의 몫이었다. 섬기던 임금을 배반하고 힘을 좇았던 전균 같은 무리에 대해선 세조는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단종과 가까운 환관들은 모조리 관노로 만들어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세조의 정치가 철저한 측근 정치였듯이 환관 정책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작가
■ 용어설명
환관(宦官)
고려·조선시대 궁정에서 사역한 내관(內官)을 일컫는다. 모두 거세된 남자들로 내시부에 소속돼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수행했다. 궁녀와 더불어 왕실 사람들의 생활 비서였던 셈이다. 환관의 조직은 태조 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됐으나 왕마다 환관을 대우하고 관리하는 방법이 달랐다. 어떤 왕을 만나느냐에 따라 환관의 ‘직장 생활’이 좌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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