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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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사진은 2020년 1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광화문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특별 강연하는 이 전 장관. 연합뉴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문학 평론가·언론인·관료·교수·시인·소설가 등 다채로운 직함을 가졌던 고인은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었다.
고인은 1933년(호적상으로는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과대학과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이 된 이래 '삼각주'(서울신문), '메아리'(한국일보), '여적'(경향신문), '분수대'(중앙일보), '만물상'(조선일보) 등에 칼럼을 쓰며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73년에는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을 지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콘스탄틴 게오르규, 외젠 이오네스코, 가브리엘 마르셀 등 세계적 작가들을 인터뷰했다. 1972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해 1985년까지 주간을 맡았으며, 1977년에는 이상문학상을 제정해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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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해 8월 25일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노태우 정부 때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1990~1991)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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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별세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문화부 현판식에서 강영훈(왼쪽) 당시 국무총리와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역사적 급변기마다 문화와 문명이라는 틀로 세상을 읽고, 앞 시대를 내다보는 시대의 기록자였다. 160여권의 저작을 통해 시대 전환의 인문학적 화두를 남겼다.
고인은 서울대 문리대에 재학 중이던 1956년 한국일보에 기성문단의 권위에 도전한 ‘우상의 파괴’라는 평론을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동리, 황순원, 서정주 등의 원로들을 강렬한 언어로 비판하며 새로운 세대의 출발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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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지면 오른쪽 상단). 한국일보 자료사진
30대에는 '한국 문화론'을 설파했다.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를 묶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책으로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파헤쳐 지식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으로까지 불렸다. 1960년대 한국 문학사의 한 사건인 김수영 시인과의 ‘불온시’ 논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고인과 김수영 시인은 조선일보와 사상계 지면을 통해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놓고 반론과 재반론을 이어 갔다.
1982년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독창적 시각으로 일본의 정체성을 분석한 책이다. 쥘부채, 주먹밥, 문고본, 분재, 휴대용 카메라와 라디오 등을 사례로 들어 일본 문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축소지향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고인은 1981년부터 1년여 동안 일본 도쿄대 비교문화 객원연구원으로 도쿄에 머무르며 일본어로 이 책을 썼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로도 번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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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한국일보 문학상 심사를 맡은 이어령 교수의 모습. 왼쪽 세번째가 이 교수로, 양쪽으로는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와 고 박완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0대에 들어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남북 분단과 동서 냉전의 극복을 상징하는 슬로건 ‘벽을 넘어서’를 선보였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위원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개회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년'도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1990년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계획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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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별세했다. 사진은 1993년 국립국어연구원 현판식에서의 모습. 이 교수는 장관 재임 시절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발족시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주의' 담론을 펼쳤다. 평생을 지칠 줄 모르는 '종합적 인문학자'로 살아 온 고인은 인생 후반에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공유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고도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 마지막 저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집필과 대담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메멘토 모리' 등에 몰두해 왔다.
이밖에도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등 소설과 희곡, 시집 등도 펴냈다.
문화예술상(1979), 체육훈장맹호장(1989), 일본문화디자인대상(1992), 대한민국녹조훈장(1992), 대한민국 예술원상(2003), 3·1문화상 예술상(2007), 자랑스러운 이화인상(2011), 소충사선문화상 특별상(2011) 등을 받았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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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동아시아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았던 2015년 9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고인의 장녀 이민아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지역 검사를 지냈다가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른다.
한국일보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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