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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3

by 까망잉크 2022. 3. 10.

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3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집안싸움 시즌 1

7. 물러나는 대원군

어느덧 고종은 스물을 넘기면서 진짜 친정을 꿈꾼다. 하지만 아비는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신하들은 대원군 눈치만 본다. 이때 강력한 조력자 민 씨 중전이 나타난다. 사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위험이 없는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한 끝에 그녀를 택했다고 한다. 가장 믿을 만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골랐지만 원래 믿었던 도끼가 발등을 찍지 않는가? 남편의 울분과 불안을 이해한 중전은 고종을 헤아렸고 부추겼다. 때마침 대원군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사대부들이 움직였다. 총대를 멘 최익현은 과격하고 결정적인 소를 올린다. 여러 현실을 진단하는 문제와 해결을 청하면서 마지막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압박한다.

 

그 지위에 있지 않고 종친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지위만 높여주시고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종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최익현의 소는 고종 부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신하들은 과격한 소에 대원군 눈치 보느라 전전했지만 고종은 여느 때와 다르게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최익현은 국문하지 않고 두둔하는 그의 제스처에 대원군은 양주의 별장에 가서 시위를 했으나 고종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자식 이기는 아비는 없는 법 드디어 고종의 시대가 온 것이다. 모든 권력을 움켜줬는데 누구도 자신에게 등 돌릴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나? 경복궁 토목공사에 따른 민심의 하락인가? 아니면 강력한 개혁에 사대부들의 반발인가? 아니면 왕비의 부추김과 이간질이었나?

 

정작 중요한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었다. 대원군은 다시 말해 왕의 아버지일 뿐 왕은 아니다.

왕조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아니라 왕에서 나오지 않는가?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자연스럽게 고종의 성인이 되면 권력을 고스란히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아들이 아니라 그가 왕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8. 개항

 

무서운 아비의 그늘 아래 드디어 고종은 친정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0여 년간 사방에 가득한 대원군의 사람들인데 어떻게 자기의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원군과 자신 사이에 줄을 타지 않는 완전한 자기 사람이 필요했다. 누굴까? 그렇게 왕비의 가족들 ‘민’ 씨에게 힘이 실렸다. 대원군이 그렇게 혐오한 세도정치 시즌2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거의 모든 정책을 물려받아 쇄국정책도 이어받았다. 반면 이미 개항한 일본은 격변의 과정을 거치며 각 서양 열강들과 연이어 조약을 맺은 한편 서양식 군사훈련을 실시하는가 한편 총포 제작소를 세웠으며 각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조선술 및 측량술을 익혔다. 그 결과 1860년에 이미 목조 증기선을 사용했으며, 실제로 운항을 하기도 했다. 외세의 위협 속에 일본에서는 위기감과 함께 존왕양이론(막부를 몰아내고 천왕을 옹립하고 서양을 배척하자)이 득세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의 뜨거운 포격 맛을 본 끝에 쇄국에서 개국으로 방향을 잡은 그들은 기어코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 중심의 나라를 세운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이라 불리는 근대화 개혁을 착수하면서 이전과 다른 서양 스타일의 나라가 된다. 그리고 서양에게 당했던 만큼 조선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업그레이드가 끝난 넥스트 레벨 일본은 이제 조선이 알고 있던 오랑캐가 아니었다.

 

앞선 프랑스와 미국이 하지 못했던 문을 열라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운요호라는 서양식 배를 타고 나타나 먼저 포를 몇 발 맞고 기다렸다는 듯 포문을 열어 거침없이 공격하기 시작한다. 두 차례의 양요 후에 포대를 확충하고 군량을 비축했지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컸다. 그렇게 해서 맺게 된 조약이 ‘강화도 조약’이다.

 

그런데 통상을 하자고 하니 이상한 소리다. 지난 300년 동안 통상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무슨 무역거래를 하자고 포까지 쏘는 것일까? 그러면 그전의 무역은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었다는 소리인데 그 말인즉슨, 일방적인 조공과 하사의 수직관계 무역이 아니라 대등한 거래를 요구하고 있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경례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예를 갖추지 않은 그런 무역이라니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버르장머리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 병자호란처럼 오랑캐라 불리는 나라에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미국에 당했던 것처럼 강화도 조약은 당연히 불평등 조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치외법권을 인정해준 대표적 불평등 조약. 그것보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제1조다. ‘조선은 자주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외교문서에는 문장보다는 문맥이 중요하다.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자,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렇게 해서 영국과 프랑스도 아니라 이웃 나라 일본에 임진왜란 이후 두 번째 침략을 당한 것이다. 차이라면, 이번에는 대포 몇 발에 순순히 문을 열었고, 그들은 땅이 아니라 장사를 하자고 하는 점이다.

 

개항의 효과는 조선 사회를 흔들기 충분했다. 좋든 싫든 간의 문을 연 다음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례로 서양 열강들에게 문을 열고 조선은 유학생을 파견하고 청나라 일본으로 앞선 기술을 배워 와서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스타일보다는 청나라식 동도서기를 기본방향으로 잡는다. 동양의 정신은 지키고 오랑캐의 기술만 배워 오겠다는 심상으로 여전히 정신은 더 우리가 낫다는 마인드가 깔려있다.

 

9. 먹는 거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된다 -임오군란-

 

개항이 되면서 일본 상인은 영국 제품 대표적으로 직물을 조선에다가 수출한다. 반대로 쌀과 콩 쇠가죽을 수입해 간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수입품이 공장에서 찍은 공산품이자 사치품인데 수출품은 농산품이자 생필품이다. 거기에 강화도조약으로 무관 세니까 일본의 배만 불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사대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쌀이 헐값으로 일본으로 나가니 쌀값이 폭등하고 물가가 인상하는데 거기에다가 서양의 것들이 몰려들어오니 자칫하다 지체 높은 성리학 세계관을 흔들 수가 있지 않은가? 이른바 위정척사 운동(사악한 것을 물리치자)이 거세어졌고, 개항과 일본과 서양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신식 군대 별기군을 만든다고 기존의 5 군영은 무위영 장어영으로 구조조정되는데 이 과정에서 예전의 군인들이 사실상 방치가 되고 만다. 거기에 개화 관련 비용이 급증하고 민 씨가 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자 당연히 군인들의 돌아갈 급료가 체불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방치된 훈련도감 군사들은 13개월 치나 급료가 밀려 있었다.

그러던 1882년 6월 그들에게 한 달 치 급료가 나왔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야 말았다. 먹는 것으로 장난치면 혼나지 않던가? 쌀과 모래를 섞어서 주고 만 것이다. 이성을 잃은 그들은 창고지기를 구타하고 그동안 쌓여있던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한단 말인가? 이게 다 일본 때문이야.. 이게 다 민 씨 때문이야.. 라며 소리를 치며 보이는 대로 일본인을 습격하고 닥치는 대로 민 씨 세도가들의 집을 불을 태우고 만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이 들기 시작한다. 너무 커져 버린 폭동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돌아갈 수 없다. 내친김에 대궐로 난입해서 왕비를 찾아온 궁궐을 헤집고 다닌다. 초유의 상황을 마주한 왕은 떨기만 할 뿐 대책이 없다. 이때 다시 등장한 돌아온 탕자 대원군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상황을 수습하고, 민비는 죽었다고 공포하고 성난 군인들을 돌려보낸다.

 

우발적인 폭동이었을까? 아니면 개화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아니면 대원군의 시나리오였던 것일까?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문을 열었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개항이 가져온 새로운 질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 당연히 대원군은 청군에 대해 더 호의적이었는데 돌연 재갈을 물려 그를 청나라로 납치해 버린다. 한 달 만에 일이다. 개항 이후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던 일본은 일시에 청나라에 주도권을 뺏기고 만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왕비는 청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궁궐로 입궐한다. 대원군은 청군에 납치되고 왕비는 호위를 받으며 돌아온다. 기가 막힌 운명의 교차였다. 그렇게 해서 임오군란 끝에 청나라 승 왕비 승으로 사건이 종결된다. 자기 나라 백성이 일으킨 난리를 외국의 군대가 진압한 것이다. 그렇게 청나라는 조선에 영수증을 첨부한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 체결되고 조선을 사대관계를 넘어 속국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조선은 이에 수긍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10. 3일간의 그들만의 천하 -갑신정변

청나라의 힘으로 다시 궁궐로 입궐한 민비는 역시나 청나라 스타일로 개화의 방향을 정하고, 그들의 가족으로 개화를 진행해 나간다. 이른바 친청 온건 개혁파 스타일로 전통을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동도서기의 길을 걷는다. 청나라는 전보다 조선 정부에 깊이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등장한다.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친일 급진 개화파 이들은 일본 미국 등을 다니며 문명개화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특히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괄목상대할 변화에 매료된 그들은 자연스레 일본식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조정은 민 씨 친청파와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친일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주도권 경쟁하는 가운데 역시 큰 문제는 돈 문제였다. 개화 정책을 펴 나가려면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친청 파는 당오전(화폐 발행)을 김옥균은 일본 차관도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김옥균의 차관도입이 불발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은 친청파로 흘러간다. 흘러가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민 씨 중심의 사대당을 몰아내야 한다며 의견을 모으고 급기야 행동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때마침 베트남 식민지를 노리는 프랑스와 청나라가 전쟁을 벌이면서 청나라는 조선의 주둔군을 빼서 베트남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기회를 잡은 개화당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일본 정부의 도움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우정국 축하파티에 디데이를 잡는다.

 

불을 지른 다음 소동을 일으켜 고종을 빼내어 궁을 옮긴다. 일본군 200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경우궁에 납치해서 친청파 인사를 차례대로 제거하고 그동안 품어온 개혁을 왕의 입에 빌려 발표한다. 이른바 갑신정변이 터지고, 개화파는 조금 더 빠르고 근본적인 수술을 시작한다. 다시 하루가 가고 3일째 눈치 빠른 민비는 대궐로 돌아가기를 청한다. 창덕궁은 도성이 넓어 수비가 어렵다고 반대했지만 거듭되는 청을 무시할 수 없어 궁으로 돌아갔는데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 간 줄 알았던 청군과 위안스카이가 순식간에 총과 포를 쏘며 궐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일본군이 막으려 했으나 이미 역부족이었다. 정변이 주역들은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임오군란처럼 왕과 왕비는 이번에도 청나라의 군대에 힘을 빌려 목숨을 또 한 번 유지한다. 그렇게 3일 만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난다. 정변은 이렇게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에게 상당한 손실을 안기고 끝났다. 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꿈꿨지만 실패 후 청의 영향력은 더 커져만 갔다. 이때 일본군은 떠나면서 청과 텐진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에서 변란 시 군대를 같이 철수하고 같이 파견한다는 조약. 훗날 이게 부메랑이 되어 또 한 번의 비극을 초래할 줄 이때는 몰랐다.

 

그렇다면 김옥균의 꿈은 왜 실패로 돌아갔을까?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삶고 하루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사명감은 어째서 실패로 돌아갔을까? 그들은 몰랐다. 김옥균은 무지한 대중을 무시했고 자체의 무력도 없이 오로지 일본에만 기댔다. 그리고 일본의 야욕을 그때는 몰랐다. 만약 그들의 정변이 성공했다면? 자체 무력이 없는 개화당은 청이 아니라 일본 군대에 계속해서 의지해야 했을 것이며 그들 역시 막대한 영수증을 내밀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지녔던 높은 애국심과 근대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후한 평가를 망설이게 한다.

 

 두 차례의 난리(임오군란, 갑신정변)를 겪으면서 이제 조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주 좁다는 걸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외세는 언제나 분열을 기다린다. 잘라먹어야 소화가 잘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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