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4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집안싸움 시즌2 승자는?
11. 잃어버린 10년
갑신정변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개화에 대한 신념과 나름의 전망이 있었다. 이후 조선은 어떻게라도 개화를 추진했어야만 했다. 불과 일본과 개항이 20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이후의 결과는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은 서양 세력의 힘과 기술을 인정하고 전면적인 흡수에 나섰다. 막부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천황 체제, 서양식 징병제 실시, 보통학교 설립 및 유학생 파견 근대식 무기와 함선 등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조선도 이러한 일본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조선이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주체도 지도력도 없었다.
왕과 왕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화가 아니라 왕실의 유지였다. 재정은 열악했고 백성들에게 꼬박 세금을 걷었으나 중앙으로 올라오는 것보다 중간에 새는 양이 더 많았다. 개화라는 열매는 개혁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데, 땀 흘리기는 싫고 달달한 열매만 맛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 석인 생각인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대부는 어느 것도 제대로 손대지 못했고, 결국 한걸음 나아가는 쪽은 언제나 ‘아래’ 백성의 몫이었다. 결국 1884~1894 10년 동안 제자리에서만 바쁘게 걸었다.
12. 동학농민운동
답답한 상황을 균열을 내는 사건이 터진다. 전라도의 비옥한 땅 고부. 언제나 그렇듯 탐관오리가 노른자 땅을 가만히 둘리가 없다. 수탈의 달인이자 군수 조병갑은 강제로 저수지 공사(만석보)를 쌓게 한 다음 물세를 걷기, 황무지 개간한 다음 징세하기 등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찾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꿈꿔왔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한다. 그전에도 농민들의 분노에 일어난 민란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 성격과 색채가 달랐다. 세도 정치 시기에도 관아를 습격하고 불사르고 했으나 수령을 잡아 죽이지는 않았고, 이웃 마을과 연대를 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병갑을 목을 베어 죽일 것을 고하고, 전주를 함락한 뒤 서울로 진격하겠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그만 소동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반란을 무려 ‘위’ 지배층이 아닌 ‘아래’ 백성들이 역모를 역사상 처음으로 기획했다.
그렇게 1894. 1. 고부 농민은 봉기했고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후 창고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수탈의 상징은 만석보를 헐어버렸다. 관군을 격파하고 고을을 점령하고 억울하게 갇힌 이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헐어 무장을 강화했다. 계속해서 연승을 거둔 농민군은 넘치는 자신감으로 마침내 전주로 진군한다. 결국 전주성을 손쉽게 함락하고 그렇게 역사상 처음으로 ‘아래’ 백성들의 세상이 되는 듯했다.
반면 왕실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 고종이 선택한 것은 뜻밖이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리 놀라운 결정도 아니었다. 임오년처럼 갑신년처럼 또다시 외세에게 군대를 요구한다. 제 나라의 백성들을 죽이고자 외국에게 요청한 꼴이 된 것이다. 먼저 청에게 정식 파병 요청을 한다. 하지만 갑신정변 이후 주도권을 뺏긴 일본은 모든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최신 전함을 구입하고 군대수를 늘리고 최신 무기를 도입했다. 때마침 텐진 조약(동시 철수 동시 주둔)을 빌미로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임진왜란 시즌2를 찍기 위해 또다시 한반도에 상륙한다.
제 나라 백성이 일으킨 반란에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정부도 한심하지만 농민군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목을 베고 밖으로는 외세를 처단하자고 일으킨 봉기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인 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봉준은 즉각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해 외세가 개입할 빌미를 없애버렸다. 하지만 일본은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농민군의 진압이 목적이 아니라 조선을 진압해 통째로 삼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고 점령한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청나라의 조약을 강제로 끊게 하고 다짜고짜 청나라 군함에게 포격을 개시한다. 이어서 반일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은 두 가지 카드를 쓴다. 첫째 대원군과 결탁이다. 임오군란 때 군인들도 갑신정변 때 김옥균도 동학운동 때 전봉준도 대원군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만큼 신망도 높았지만 대원군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컸다.
둘째, 내정개혁 카드다.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화폐 체제를 구축하고 조세를 금납화, 도량형 통일,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 과부의 재가 허용, 노비제 폐지 등 획기적인 사회 개혁법안도 많았다. 하지만 대원군과 결탁도 획기적인 갑오개혁도 일본에 대한 반감을 누르지는 못했다.
대원군을 경복궁의 주인으로 들어앉힌 지 이틀 만에 일본은 청 육군을 기습했다. 드디어 갑신정변 때 예고되었던 두 나라의 전쟁이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대회전인데 하필 그 무대다 또 한반도다. 청의 동도서기냐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냐 의 싸움은 싱겁게 결국 일본에게 돌아갔다. 전리품은 누가 뭐래도 조선이었다.
외세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철수한 전봉준은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자 척왜의 기치를 걸고 재봉기 했다. 그 결과 1894 10월 11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모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넘치는 자신감, 종교적인 신념도 일본군의 기관총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전봉준도 농민군도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의병처럼 그들 역시 순진한 게 아니라 적어도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포부는 진심이었다.
12.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일본은 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대만을 빼앗고 배상금도 받았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릭국임을 승인한다.”라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떡을 혼자 차지하게 된 일본은 곧장 갑신정변으로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귀국시켜 친일 내각을 개편하고 홍범 14조라는 새로운 개혁안을 발표한다. 왕실과 국정을 분리시킨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니 왕실의 유지가 목적인 왕과 왕비는 또다시 자신들을 지켜줄 큰 형님을 찾는다.
눈치 볼 게 없다고 생각했던 일본인데 또 다른 적이 나타난다. 어렵사리 청일전쟁으로 이긴 전리품인 랴오둥 반도를 러시아가 도로 뱉어내라고 한다. 그것도 영국과 프랑스라는 형님들을 데리고 3:1로 협박하면서 말이다.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어렵사리 쌓아온 한반도의 주도권을 또 양보하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왕과 왕비는 러시아 큰 형님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친러파 내각을 만든다.
이러한 상황이 일본에 전해지고, 일본은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조선 공사에 미우라 고로 교체하고 무장을 한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특유의 사무라이 깡패 정신으로 왕의 침실로 들어간 사내들은 고종의 옷을 찢고 세자의 목을 후려쳤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찾아 왕비의 처소로 달려갔다. 누가 왕비인지 궁녀들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앞을 막아서는 궁녀와 왕비를 모두 죽이고 시신을 불태우고 재마저 여기저기 흩뜨려놓아 찾을 수 없게 했다. 허수아비 남편을 주무르고 20년간 권세를 누리는 동시에 조선을 몰락을 앞당긴 그녀는 결국 을미사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 미우라와 관련된 인물을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 발뺌한다. 러시아에게 요동을 놓친 것도 억울한데 조선마저도 러시아의 영향 아래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아직 러시아에 일대일 맞짱 실력은 부족한 일본이 선택한 카드가 ‘깡패짓’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국모인 명성황후를 비참하게 잃은 조선 백성들에게 11월 시행된 단발령은 반일감정을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다. 조선 전역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국의 왕비를 깡패를 동원해서 제거할 만큼 일본은 사정이 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근대국가라고 자신하는 그들은 여전히 중세의 막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정식 전쟁도 아니고 테러에 가까운 일본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일본 버전의 군국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3. 아관파천-남의 집으로 도망가다
백성들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사무친 사람이 있다. 바로 고종. 이제는 혐오를 넘어 두렵기만 하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 그나마 날개를 펴준 명성황후는 아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파트너이자 보디가드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몸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때마침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이 공허한 고종의 마음에 파고든다. 1896.2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가마를 타고 몰래 궐을 빠져나가 새로운 치마폭을 찾는다. 바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거처를 옮겼다고 해서 아관파천이라 불린다. 선조와 인조를 이어서 파천을 하게 된 또 다른 조선의 왕 다소 쪽팔리지만 어찌 됐든 새로운 보디가드를 찾았다. 그로써 친일 내각을 정리하고 친러 내각을 구성한다. 명성황후가 주도했던 러시아 큰 형님 찾기가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러시아는 조선에게 영수증을 첨부한다. 각종 이권사업과 삼림 채벌권 철도부설권을 넘긴다. 생명을 지켜주는 값인데 이 정도쯤이야~~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주도권은 다시 러시아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할 일본이 아니었다.
14. 며느리와 시아버지
명성황후는 남편을 도와 정치를 시작한 이래로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도 안 겪을 일은 숱하게 겪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이 죽고 친정이 폭사했고, 임오군란 때는 가짜 상도 치렀으며 갑신정변 때 경우궁을 피신할 때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 경복궁 침범까지도 잘 넘겨왔나 싶었는데 가장 참혹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정치적인 수완과 탁월한 안목에도 불구하고 민 씨들의 세도정치 때문에 평가도 인색하다. 또한 권력유지가 목적인 그녀인 만큼 조국의 개화보다는 왕실의 안정이 먼저라 개화도 뚜렷한 방향과 비전도 없었다. 대원군의 반대로 개항을 하고 친일파에 붙었다가 갑신정변 계기로 다시 친청파 또 삼국간섭으로 친러파까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있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내부 개혁도 이루지 못했다.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로 개혁도 개화도 실패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반면 대원군 캐캐 묵은 조선의 병폐를 10여 년 만에 해결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오판으로 쇄국을 고집했다. 이후 권좌에서 물러났으나 임오군란 때 잠시 집권하는가 하더니 청나라에 끌려가 유배 생활하고 다시 들어왔다. 갑신정변 때도 동학농민운동 때도 심지어 을미사변 때도 정치 세력들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비전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망도 두터웠다. 하지만 수많은 정치 세력이 러브콜을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은 남자였다. 권력욕과 복수심에 가득한 그가 차라리 자식이 아니라 본인이 왕이 되었더라면 좋았으렸만, 아들과 며느리에게 권력싸움하느라 허송세월을 허망하게 보냈다. 굵직한 이벤트에는 항상 그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들러리나 조연에 불과했다.
가족 간의 다툼에 외세가 개입할 틈을 주고 말았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까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대외의 적이 있으면 가족끼리 뭉쳐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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