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진지와 수라
기사입력 2022.03.25. 오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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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밥은 시대나 지역에 따른 차이가 거의 없이 늘 같은 말이라는 사실은 여러 번 강조됐다. 그렇다고 상황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심마니들은 쌀을 ‘모래미’라 하고, 밥을 ‘무루미’라고 한다. 심마니들만의 은어이지만 남들이 못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신성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제사상에 올리는 밥은 ‘메’라 하고, 어른께 올리는 밥은 ‘진지’라 한다. 특별히 임금께 올리는 진지는 ‘수라’라 한다.
메와 진지는 15세기에는 각각 ‘뫼’와 ‘진지’로 표기됐으니 꽤나 오래된 말이다. 따로 어원을 밝히기가 어려우니 본래부터 있던 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밥은 보통 ‘먹다’를 쓰지만, 조상이나 집안의 어른에게 바치는 메나 진지는 ‘들다’ 또는 ‘잡수다’나 ‘자시다’를 쓰고, 더 높이려면 ‘잡수시다’를 쓴다. 이 ‘자시다’가 앞에 나온 말을 부정하기 위해 ‘알아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와 같이 쓰이기도 하는데, 본뜻에서 꽤나 멀어진 표현법이다.
이에 반해 수라는 ‘탕(湯)’을 뜻하는 몽골어에서 온 것으로 본다. 원의 지배를 받던 무렵에 몽골어 어휘가 여럿 유입됐는데, 그중 하나가 특수한 용법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수라는 ‘잡수다’를 더 높여서 ‘젓수다’를 쓴다. 이것 역시 어원을 따로 밝히기는 어려워 기존의 말을 조금씩 달리해서 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밥, 진지, 수라’는 등급이 있고 ‘먹다, 자시다, 잡수시다, 젓수다’도 등급이 있다. 같은 쌀로 지어도 누가 먹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에는 임금이 없으니 수라를 젓술 일도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진지 잡수세요’는 ‘식사하세요’로 대체됐다. 몽골어가 궁중의 최고 표현을 차지하듯이 한자어가 최고 등급의 높임 표현이 된 것이다. 이것이 아쉽다면 집 안팎의 어른에게 공손하고도 진지하게 ‘진지 잡수세요’를 써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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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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