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 2일, 대한교육연합회가 전국에서 선발한 모범어린이들을 표창하고 그들의 어머니와 지도교사 등 45명을 데리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때 충북 음성군 삼성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진용준 어린이가 어머니 박공례(당시 39세)씨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왔다. 진군은 동네에서 3㎞ 떨어진 학교까지 날마다 소아마비에 걸려 거동이 어려운 학우를 등하교 길에 업고 다녔다. 그 선행이 알려져 모범어린이로 선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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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육 여사의 관심을 끈 것은 진군의 등 뒤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서 있는 30대의 초라한 모습의 어머니 박공례 여인이었다. 육 여사는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주의 깊게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인은 구안와사병을 앓아서 입이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보기에도 민망하고 측은한 모습이었다.
육 여사는 “살림이 너무 가난해 아들을 낳은 후 산후조리가 부실해 이렇게 되었다”는 박 여인의 말을 듣고 농촌의 궁핍상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 듯했다. 더구나 보기 흉한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 한 여인의 슬픔이 자신의 것인양 마음 아파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내가 치료해 드리지요.”
영부인은 그 여인을 서울의 잘 알려진 침술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영부인이 부담했다. 3개월간의 치료를 마치고 입이 제자리로 돌아온 박 여인은 8월 14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육 여사는 며느리도 없이 그동안 고생한 박여인의 시어머니께 한복 옷감을 보내주었다. 또한 박 여인이 그동안 유숙했던 박 여인의 친지집 주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선물을 보내주었다. 육 여사는 이처럼 매사에 철저하고 사려가 깊었다.
맹자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이라고 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는 어진 마음은 지도자의 도(道)가 아니겠는가. 고향에 내려간 지 하루만인 8월 15일 육 여사의 비보를 들은 박 여인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빈소를 찾아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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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잠자는 여인
1972년 2월 초였다. 서울 서부경찰서에 근무하는 한 말단 순경의 아내가 육 여사에게 색다른 호소를 해왔다.
갓 결혼한 그들은 단칸방을 세 얻어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홀로 남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그런데 남편이 야근을 하는 날 밤이면 이 주부는 방안에 들어가 잠을 자지 못하고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날밤을 세우기 일쑤였고, 시아버지는 시아버지대로 그런 며느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형편이니 방 하나를 더 얻을 수 있도록 전세금 30만원만 도와달라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밤새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일 늙은 시아버지와 부뚜막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 며느리의 딱한 심정 그리고 그런 가정을 두고 야간근무를 해야 하는 말단 경찰관이 어떻게 마음을 잡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영부인은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을 했다.
영부인의 지시로 나는 서대문 금화터널 밑에 살던 그 주부의 집을 찾아갔다. 뜻밖에 찾아온 영부인 비서로부터 전셋돈 30만원을 받아들고 너무 감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편지를 보냈던 이숙희(가명)라는 여인과 그 경찰관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남다른 효심의 자녀들도 두었겠지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사법고시 준비생과 시골 처녀
1973년 봄에 충청도 시골에 사는 한 처녀가 육영수 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시골마을, 산사(山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조그만 가게를 차려 놓고 장사를 하던 시골처녀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생활용품을 사러 가게를 자주 찾은 서울 총각과 서로 좋아하게 되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 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영부인은 이 편지를 박 대통령에게 드렸다. 박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이 여자의 편지 내용대로였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와 진실을 수호해야 할 법관으로는 자질 면에서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과 함께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법관 임용이 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0·26사건 뒤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마구잡이로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초기 변호인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변론을 자원했을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것이 지금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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