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역사) 이야기

가까이서 본 인간 육영수 ⑩ 간첩혐의자의 억울한 사연

by 까망잉크 2022. 4. 24.

⑩ 간첩혐의자의 억울한 사연


박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난 2년 후, 1981년 어느 봄날이었다. 말쑥한 차림의 중년 신사 한 분이 청와대 비서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 신사는 자신을 이규형(가명)이라고 소개했지만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난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금방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3년 늦가을, 이씨는 대통령 영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씨는 성균관대학 구내에 있는 유도회(儒道會) 건물에서 기거하면서 그 유도회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유도회 총무라는 사람이 이씨에게 좋은 사람을 한 사람 소개해 줄 테니 만나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유도회와 관련된 일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속 장소인 미도파백화점 내에 있는 다방으로 나갔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오른쪽)를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 대접을 하는 육 여사.
그날 이씨가 만난 정명악(가명)이라는 사람은 이씨보다 나이가 몇 살 위로 보였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정부를 비방하면서 은연중에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이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명악은 이씨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협조와 동참을 요구했다. 겁이 난 이씨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중앙정보부에서 이씨를 연행해 갔다. 그날 정명악과 이씨와의 대화 내용은 모두 녹음되어 있었으며 혐의점이 있어 계속 정명악을 미행했던 정보부 직원들에게 정명악은 그 일로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씨는 수차례 정보부의 조사를 받았고 정명악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일이 있은 후 이씨는 요시찰 대상에 올라 관할 파출소로부터 항상 감시를 받았으며, 대통령의 외부 행사가 있을 때면 경호실 지시라며 경찰관들이 찾아와 바깥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씨는 취직이고 뭐고 되는 게 없었다. 더구나 그를 보는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도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씨는 요로에 수십 번 진정서를 냈다. 그러나 매번 허사였다. 그러다가 누구한테 들으니 육 여사에게 편지를 내면 바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는 모든 사연을 적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대통령 영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씨의 사연을 읽은 영부인은 즉시 나에게 경호실에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나는 경호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의 내용과 담당자의 의견을 물었다. 자기들의 판단으로도 이씨의 경우는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억울한 일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느냐고 했더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육영수 여사께서는 나의 보고를 듣고 나서는 이런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느냐면서 경호실장에게 연락해서 대통령께 말씀 드릴 테니 그 사람을 즉시 구해주라고 지시했다. 이씨는 그 후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고 어느 골프장에 과장급으로 취직이 되어 마음 편하게 가족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세월이 지나서 그는 골프장 사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한국인으로 귀화하시오”
박대인 목사

1970년대, 30여 년간 한국에 살면서 목회와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생활을 한 미국인 박대인(朴大人·본명 에드워드 포이트라스) 목사는 한국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외국 신문에 기고하는 등 반한 활동을 활발히 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조선일보 ‘일사일언(一事一言)’ 칼럼을 통해 유신을 비판하는 글을 계속 기고했다. 1974년 초 박대인 목사는 이화여대 김 모 교수를 통해 육영수 여사를 한번 만나고 싶다며 면담을 신청해 왔다.

1974년 2월 육영수 여사와 박대인씨는 청와대에서 3시간이 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박 목사는 유신체제의 비민주성과 인권문제 등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했다. 박 목사의 불만과 비판을 다 듣고 난 육영수 여사는 “목사님의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글로든 말씀으로든 우리나라를 비판하시려면 무엇보다 한국으로 귀화해서 한국인이 된 다음에 비판해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끼어들면 내정 간섭의 인상을 씻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면담 결과를 우리에게 설명하면서 영부인은 “박 목사가 아무런 말을 못하더라”고 하며 웃었다. 그날 이후 박 목사는 다시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2014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에 박대인 목사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1989년 한국을 떠났던 박 목사가 17년 만에 돌아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1974년 초 육영수 여사를 만났을 때 육 여사가 유신통치에 대한 박 목사의 불만과 비판을 다 듣고 나서는 갑자기 “목사님 한국인으로 귀화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어 자신이 크게 놀랐다고 했다.

 

김두영前청와대비서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