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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주말] 섬마을 장모님의 서울 꽃구경

by 까망잉크 2022. 4. 23.

[아무튼, 주말] 섬마을 장모님의 서울 꽃구경

[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골절상 입고 서울 온 장모님
석달간 동거하며 생긴 일

봉달호 '힘들 땐 참치마요' 저자

입력 2022.04.23 03:00

 
 

갓 태어난 외손녀 보고파 서울로 향하던 장모님이 골절상을 입으셨다. 완도 섬에서 뭍으로 나와야 하는데, 배에 오르다 미끄러진 것이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수술해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그렇다고 섬에서 치료받을 수는 없고, 광주 아들네엔 아픈 식구가 있어, 결국 딸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가시려던 곳도 그곳이었으니까.

일러스트=김영석

“딸네 집도 당신네 집인데 어려울 거 뭐 있으시대?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는 걸. 어른이 집에 계시면 의지도 되고 좋잖아. 마음 편히 오시라고 해.” 장모님과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게 그리 ‘숟가락 하나’ 정도 일은 아니었다. 다리가 불편하시니 온종일 소파에 누워 TV만 보셨다. 두 돌 난 아들 녀석이 할머니 옆에 딱 붙어 ‘드라마 천재’가 됐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거실을 나다닐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에 잠깐 아버지 모실 때 아내가 얼마나 불편했을지 이제야 고스란히 이해됐다.

며칠 지나 장모님 단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건강 염려증. 갑작스레 상경하다 보니 원래 드시던 약을 챙겨 오지 못했는데, 나중에 택배로 도착한 꾸러미를 보니 소쿠리 한가득. 언뜻 열댓 종은 되어 보였다. 점입가경, 장모님의 약품 리스트는 갈수록 늘었다. 케이블TV에는 건강 관련 프로그램이 왜 그리 많은지, 어느 날 보면 광고에 나오던 그 약이 장모님 곁에 도착해 있었다. 관절 건강에 좋다는 약, 피부 노화 개선에 특효라는 약, 혈압과 신경 계통을 시원히 뚫어준다는 약, 요즘 유행인 산양유 성분이 들었다는 분말…. 처가에 갈 때마다 거실 바구니에 웬 약이 저리 많나 했더니 그 정체를 알게 됐다.

예전에도 운동을 하시라 권했건만 “맨날 힘쓰는 게 일인디?” 하는 것이 시골 어르신들 말씀이었다. 육체노동으로 운동은 충분하시단다. “늙으면 약의 힘으로 사는 거여.” 끼니때마다 알약을 한 움큼 삼키셨다.

가끔 병원에 가는 것을 빼고 장모님은 바깥출입을 일절 안 하셨다. 재활 치료를 위해서는 자꾸 움직여야 하는데도 뉴스에 나오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를 보며 오직 ‘거실 소파’만 고집하셨다.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라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연못과 정원, 운동 시설이 있는데도 “집 밖은 위험하다”는 것. “어제는 16만이었고 오늘은 20만이라는디… 확진자가 사방 천지여. 나는 밖에 나댕기기 무섭네 그려.” 집에서도 꼭 마스크를 쓰셨다. 방역 수칙 준수 1등 표창장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집에만 계시고 활동량이 부족하니 당연히 체중이 늘었다. 어지럼증이 있다고 하여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몽땅 해주었다. “어머님, 지금 드시는 약이 너무 많아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습니다. 비타민, 칼슘 빼고 다 끊으세요. 그리고 운동도 하시고요.” 어찌나 속 시원하던지. 장모님의 또 다른 특징이 있으니 의사 선생님 말씀은 어김없이 지킨다는 것. “장모님, 이 칼슘 약은 드셔도 된다잖아요.” “아녀, 간에 안 좋대.” 그날 이후 장모님은 모든 약을 끊으셨다. 그리고 하루 서너 시간, 부지런히 아파트 단지 곳곳을 돌아다니신다. 목발 사용도 제법 익숙해지셨다.

세상 모든 집안에는 저마다 소설 하나쯤 사연이 있는 법. 장모님의 건강 염려증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배경이 있다. 결혼 며칠 전 아내는 오빠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광주 사는 처남 말고 또?” 고등학교 때 병이 생겨 30년 가까이 요양원에 있다는 오빠. 식구들이 면회 가면 아직도 빙그레 웃기만 한다는 오빠. 처가 식구들에게는 가슴 아픈 손가락이다. 아내가 왜 그토록 그릇과 이불을 삶고 또 삶는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발부터 씻으라고 등짝을 때려댔는지, 그때야 이유를 알았다. 처가 식구들이 매년 꼬박꼬박 건강검진을 받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마음 또한 비로소 이해되었다.

장모님은 석 달 넘게 우리 집에 계셨다. 섬을 그리 오래 떠나 있기도 처음이라 하셨다. 고향에 내려가기 전, 벚꽃이 한창인 석촌호수와 탄천 주변을 구경시켜 드렸다. 물론 코로나가 걱정된다며 오직 차 안에만 계셨더랬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더니 연분홍 꽃잎이 한들한들 몰려들었다. 그 꽃잎 간지럽다며 소녀처럼 웃으셨다. “아따 봄이 좋긴 좋네잉.” 장모님 마음속 근심에도 꽃잎 가 닿길. 지금쯤 “사위가 꽃구경 시켜줬당게” 하시면서 윗집 화순댁, 아랫집 마량댁을 심술 나게 골려 먹고 계실 거다. 섬에도 꽃은 많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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