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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박영규의 지식카페 - (9) 의녀들의 직장 생활

by 까망잉크 2022. 6. 16.

 박영규의 지식카페 - (9) 의녀들의 직장 생활

관비 신분이지만 조선 여성들 중 가장 교육 많이 받아
남성들이 첩으로 가장 선호,‘약방기생’으로 불리기도

남자 의원들은 부인병 진료에 한계 있어 태종때 양성제도 도입
중국·서양 역사선 찾아볼 수 없어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궁궐에 근무하는 여성 중에 궁녀 다음으로 핫한 전문직 여성을 꼽으라면 단연 의녀였다. 의녀는 비록 관비 신분이었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뜻밖에도 의녀는 조선 남성들이 첩을 들일 때 가장 선호하던 여인이었다. 거기다 의녀는 관청에 예속된 관비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이기도 했다. 도대체 의녀의 어떤 면 때문에 조선 양반들은 그들을 첩으로 들이기 위해 안달이 났으며, 또 관비들은 왜 의녀가 되길 그토록 소원했을까?

의녀를 다른 말로 약방기생이라고 불렀다. 이는 연산군 때 의녀도 연회에 동원시켜 술을 따르게 하고 여흥을 돋우게 한 데서 비롯됐다. 약방기생 의녀는 일반 기생보다도 훨씬 상급으로 대접받았다. 그래서 기생재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의녀의 본분은 의술을 행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비록 신분은 천비였으나 여자 의사이며, 조선의 여성 중에 가장 많은 공부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의사가 해야 할 공부의 양은 엄청나다.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니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의학이다. 그런 까닭에 의원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공부가 필요했고, 의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의 여성은 한문 공부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의녀는 조선 여성 중에 가장 많이 문자를 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엔 의원을 천시했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피를 닦아내고 고름을 짜내고, 온갖 병에 걸린 환자를 접해야 했으므로 양반은 기피하는 직종이었다. 그래서 천민에게 의사의 소임을 맡겼던 것이다. 원래 조선에는 여자 의사, 즉 의녀가 없었다. 그런데 남녀의 분별이 유달리 강조됐던 조선에서 부인병을 남성 의사가 진료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의녀였다.

의녀 제도가 도입된 것은 태종 6년(1406년)이며, 목적은 부녀자의 병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 의원에게 몸을 보이기를 꺼려해 병을 앓고 있어도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녀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경국대전’엔 3년에 한 번씩 의녀를 뽑고, 그 숫자는 150명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한 70명은 내의원에 배치됐고, 나머지는 각 지방의 의원에 소속됐다.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는 궁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궁녀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가 궁궐을 드나들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을 단순히 궁녀라고 부르긴 좀 곤란하다. 의녀는 반드시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관처럼 일정한 품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의녀 중에 일부만 궁궐에서 근무하는데, 그들 역시 궁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한다. 거기다 의녀는 여관과 달리 결혼할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은 ‘궁궐에 사는 여자’라는 의미의 궁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하지만 궁궐에 근무하는 내의녀의 경우 궁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무수리 중 일부도 궁궐에 상주하지 않고 출퇴근하지만 궁녀의 범주에 포함되듯이 내의녀 또한 비슷한 처지인 까닭이다. 이런 의녀에 대한 논의가 처음 이뤄진 것은 태종 6년 3월 16일이다. 이날 제생원 지사로 있던 허도는 이런 상소를 올렸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 그 병을 보여주길 즐겨 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곤 합니다. 원컨대 창고나 궁사의 어린 여자아이 10명을 골라 맥경과 침구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면 전하의 덕에 큰 보탬이 될 듯합니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옳게 여겨 어린 여자아이 10명을 뽑아 의술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그들을 수련하고 교육하는 일을 제생원에 맡겼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우리 역사 최초로 여자 의사가 탄생했다. 여의(女醫)는 중국이나 서양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직업이다. 더구나 단순히 남자 의원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병을 직접 치료하고, 진맥하고, 시침하고, 처방하는 일까지 모두 담당하는 전문 여의사였다.

이때 뽑은 10명 중에 여의로 성장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7명 중에서도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의녀는 5명뿐이었다. 제생원은 그들 5명으로는 부인병을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가 1418년 6월 21일이었다. 당시 제생원의 요청을 받아 예조에서 올린 글은 이렇다.

“의녀는 모두 7명인데, 재예를 이룬 자가 5명이므로, 이들을 여러 곳에 나눠 보내면 늘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각사의 비자(婢子) 중에서 나이가 13세 이하인 자 10명을 더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태종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10명의 의녀 후보생을 뽑도록 했다. 이렇듯 초기에는 부정기적으로 의녀를 뽑아 양성했지만, 의녀의 필요성이 더 생기면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뽑고, 또 숫자가 모자라면 부정기적으로 뽑았다. 이렇게 해서 의녀는 조선 관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정착하게 된다.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

조선 초기의 의녀 교육은 모두 제생원에서 했다. 하지만 세조 이후 제생원이 사라지면서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나눠서 의녀를 교육시켰다. 교육은 2명의 교수가 중심이 돼 이뤄졌고, 교수 외에 훈도들이 보조 기능을 했다. 2명의 교수는 모두 문신이며, 그 아래에 의원들이 배치됐다. 의녀는 총 3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첫 단계는 초학의(初學醫)라고 하고, 오직 학업에만 전념하는 시기다. 이 기간은 대개 3년이다. 의녀는 이 3년 동안 ‘천자문’ ‘효경’ ‘정속편(正俗篇)’ 등의 책으로 글을 익히고, ‘인재직지맥’ ‘동인침혈침구경’ ‘가감십삼방’ ‘태형혜민화제국방’ ‘부인문산서’ 등의 의서와 요즘의 수학인 ‘산서(算書)’를 배워야 했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의녀는 지방에서 이미 글을 익히게 한 다음 중앙으로 올려보내야 했다.

초학의 기간의 학습 진행은 이렇다. 제조가 매월 상순에 책을 강독하면, 중순엔 진맥과 약에 대한 교육을 하고, 하순엔 혈의 위치를 교육받았다. 그리고 연말에는 제조가 방서(方書)와 진맥, 명약(名藥), 점혈(點穴) 등을 총체적으로 강의한 후 1년 동안 강의에서 받은 점수를 계산해 성적에 따라 조치한다. 불통이 많아 낮은 성적이 나온 사람은 봉족(奉足)을 빼앗는데, 첫해는 한 명을 빼앗고, 둘째 해는 2명을 빼앗고, 셋째 해에도 불통이 개선되지 않으면 원래 신분인 관노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때 관노의 자리로 돌아간 빈자리는 비자 중 한 명을 선택해서 채운다. 봉족이란 국역 편성의 기본 조직으로 나랏일을 보기 위해 복무하는 집안에 붙여주는 일종의 공익요원이다. 원래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평민은 군역을 담당해야 하는데, 이들 중 군역에 동원되지 않은 사람은 봉족으로 충당됐다. 봉족으로 충당된 사람은 배치된 집안에 가서 일을 도와야 했고, 이것은 곧 경제적 혜택과 같은 것이었다. 의녀의 집안에도 봉족이 주어졌는데, 의녀의 봉족을 줄인다는 것은 의녀의 급료를 줄이는 것과 같은 조치였다.

또 초학의 기간 세 달 이내에 세 번 불통 점수를 받은 사람은 혜민서의 다모(茶母)로 보내고, 다모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공부를 게을리해 성적이 좋지 않으면 역시 본역인 관비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학의 3년 기간이 끝나면 간병의(看病醫)가 된다. 이 기간엔 말 그대로 간병을 하며 의원을 보조하고 병에 대해 익힌다. 이 간병의 생활은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빨리 특정 분야를 익혀 뛰어난 의술을 보이면 내의로 발탁되고, 그렇지 않으면 40살이 될 때까지 간병의로 남아야 한다. 그리고 40살이 지났는데도 전문 분야가 없으면 본역인 관노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간병의 중에 성적이 뛰어난 사람 네 명을 매달 뽑아 그들에게만 급료를 준다.

간병의 중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 2인을 선택해 내의녀(內醫女)로 임명한다. 내의가 되면 비로소 월급이 나온다. 또 녹전(綠田)은 없지만 계절에 한 번씩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체아직(遞兒職)에 임명될 수 있다. 명실공히 관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체아직이란 특별한 경우에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관직이다. 정해진 녹봉은 없고 1년에 네 차례 근무 평정에 따라 녹봉이 주어지고, 직책은 보장되지 않는다. 일종의 계약직인 셈이다. 의녀에게 벼슬을 내릴 땐 체아직밖에 내리지 못했는데, 이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반직 중 하급직은 대부분 체아직이었으며, 기술 관료나 훈도도 체아직이었다. 체아직엔 전체아와 반체아가 있는데, 전체아는 자리가 1년 동안 보장된 것이며, 반체아는 6개월 단위로 근무를 평정해 근무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내의녀 중에서 뛰어난 의녀는 임금을 보살피는 어의녀로 삼는다. 대개 어의녀는 내의녀 중에 최고 고참이 하게 되는데, 개중에는 60살이 넘도록 근무한 사람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어의녀 대장금은 무려 20여 년 동안 어의녀로 지냈다.

작가


■용어설명 - 제생원

조선 초 서민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 만든 의료 기관. 1397년(태조 6년)에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의 건의로 설립됐다. 질병 치료뿐 아니라 구호 사업, 의녀 양성, 향약재 수납, 향약에 관한 의학서 편찬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1460년(세조 6년)에 기존에 있던 의료 기관 의료 기관 혜민국에 통합됐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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