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1)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1)
여종의 아들로 태어나다
유자광은 경복궁 문지기로 일하다가 정 5품 병조정랑, 곧이어 정 3품 병조참지로 승진하였다.
오늘날 군 하사관 정도의 신분인 갑사(甲士)에서 3개월 만에 무인의 인사를 책임지는 병조정랑이 되었다. 지금의 국방부 인사국장 정도의 자리이다. 5개월 뒤에 다시 병조참지가 되었으니 오늘날 국방부 차관보에 버금가는 직책이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나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년 6개월 만에 경복궁 문지기에서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어지러울 정도의 과속 승진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유자광은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약점도 있지 않았는가.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유자광은 수많은 선비들이 피를 흘린 무오년에 일어난 사화(士禍)를 주도한 사람이다.
그는 사림의 스승 김종직이 중국의 역사와 은유로 가득 채워 세조를 비난하고 단종을 애도한 조의제문을 제대로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격노한 연산군은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지낸 유규의 아들로 그의 생모 최씨는 노비의 신분이었다. 유자광의 어미 최씨는 유규의 부인인 송씨의 몸종이었다.
남원 땅에서 전해지는 유자광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유자광의 아버지 유규가 우연히 낮잠을 자다가 백호(白虎)가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이 꿈이 대단한 인물을 낳게 할 영험한 태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의 방으로 건너가 꿈 이야기를 하고 합방을 원했지만 부인은 ‘대낮이라 망측하다’고 거절했다.
유규는 답답해하면서도 하릴없이 사랑방에 건너왔다. 마침 최씨가 사랑방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 당시 최씨는 30세의 나이였다.
유자광은 여종의 몸에서 나왔으니 얼자였다. 당시의 법인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의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비의 신세였다. 얼자는 양반 아버지와 천민 신분의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다. 서자(庶子)는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인 양인(良人)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는데, 서자와 얼자를 합해서 서얼(庶孼)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규는 유자광의 이름에 집안의 항렬(行列) 자를 넣어 짓는 등 아들로 대했다.
유자광은 성숙해지면서 국법(國法)으로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을 알고 방황하였다. 국법은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庶孼) 차별법이었다.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인 서얼은 과거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었다.
유자광은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도박과 술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유규는 방황에 빠진 유자광에게 갑사가 되기를 권했다.
하급무사인 갑사는 궁궐을 지키는 갑사와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경을 방비하는 양계(兩界) 갑사, 백성들이 호랑이의 피해를 받지 않게 호랑이를 잡는 착호(捉虎) 갑사의 세 종류가 있었다.
갑사가 되면 넉넉하지는 않지만 나라에서 녹봉을 받을 수 있고, 전장에서 공을 세우면 교위(校尉) 같은 장교나 궁궐과 임금님을 경호하는 겸사복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자광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고, 갑사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시험 과목은 서서 정지한 채로 활쏘기, 말을 달리며 활쏘기, 전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달리기 등이었다. 중무장하고 달리기는 중무장 보병으로서 자질과 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신 갑옷을 입고 화살 통을 맨 채 활과 칼을 들고 300보 이상은 거뜬히 달려야 했다.
서서 활쏘기는 1백80보(步) 거리에서 화살 3개를 쏘아 2개 이상 과녁을 맞혀야 했다. 말을 달리며 활쏘기는 기병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기 위해 세 번 쏘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맞혀야 했다.
유자광은 열심히 준비한 탓으로 갑사 선발 시험에 무난히 합격하였고, 바로 궁궐을 지키는 갑사로 배치되었다. 유자광은 풍채가 건장하고 이목구비가 큼지막하며 눈썹도 진하여 한눈에 보아도 무인의 기풍이 있어,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양 도성에 사대문이 있듯이 경복궁에도 사대문이 있다. 남쪽의 광화문, 북쪽의 신무문, 서쪽의 영추문, 동쪽에 있는 문이 건춘문이다.
천출인 유자광은 갑사의 신분에서 병조의 정랑과 병조참지를 거쳐, 판서급인 2품에 이어 1품의 재상으로 올랐다.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벼락출세였다. 이 벼락출세에는 세 번의 분수령이 있었다.
첫 번째의 전환점은 이시애의 난이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맞아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다.
1467년 세조 13년 6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켜 날로 세력을 떨치던 이날, 갑사 유자광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상소는 유자광 인생 약진의 크나큰 전환점이 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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