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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2)

by 까망잉크 2022. 7. 25.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2)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by두류산Jul 15. 2022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2)

 

난세를 맞아 기회를 얻다

 

 세조 13년 5월,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군사를 모아, 길주를 습격해 함길도 병마절도사와 길주 목사를 살해했다. 

조정이 혼란을 겪으며 반란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토호와 군민 등 반란군 2만여 명은 함길도 전역의 고을 수령들을 대부분 죽이며 단천과 북청을 공략하고, 뒤이어 함흥을 점령했다. 

 

 심각한 보고가 잇따르자 세조는 토벌군을 편성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토벌군은 귀성군 이준을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강순과 남이가 토벌대장을 맡았다. 

 귀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의 조카이며, 토벌대장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로 세조의 외조카였다. 

 

 도총사(都摠使) 귀성군 이준과 당대의 명장들은 북방으로 진군을 했으나 마천령이라는 험준한 지세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1467년 세조 13년 6월 14일, 실록은 갑사 유자광이 이시애 난에 대한 대책을 상소로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록에 의하면 임금이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하며, 도승지 윤필상을 불러 그 글을 읽어보게 하고 말했다. 

"이 글은 과인의 뜻에 매우 합당하다. 유자광이라는 자는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장차 그에게 벼슬도 주고,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리라.” 

 

 실록은 상소의 전문을 실었다. 실록에 근거하여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자광은 자신의 처지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臣)은 갑사에 소속되어 교대근무를 마치고 남원에 있으면서 역적 이시애의 일을 식사하다가 듣고서는 즉시 상을 물리고, 남원 관아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징병하는 문서 속에 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북방으로 행군하기를 여러 날 기다렸는데, 군현에서 행군 날짜를 정하였다는 지령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에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어찌 사방의 병사를 모두 징발한 연후에야 일개 이시애를 토벌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나라를 위하여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우고 죽으려고 마음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국가를 배반하는 역적을 보고, 신이 어찌 징병 대열을 기다리며 멀리서 편하게 자고 먹는 것을 좋게 여기겠습니까?”

 

 이어서 유자광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리하여, 신은 남원을 출발하여 하루에 평소보다 갑절의 길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해서 사람에게 물으니 모두 이르기를, ‘역적 이시애는 아직도 소굴을 지키면서 죄 없는 이를 함부로 죽여 함길도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역적들을 즉시 나아가 평정하지 못하고 전하의 다스림에 누(累)를 끼치는지 의문입니다. 

 듣기로는 전하께서 벌써 여러 번 장수들과 병사를 북방으로 보냈다 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제까지 한 장수도 이시애의 머리를 참(斬)하여 한성에 바치는 이가 없습니까? 만약 즉시 토벌하지 못하면 이시애가 더욱 흉악하게 될 것이고, 날을 허비하여 역적의 목숨을 끊지 못하면 함길도 수십 주(州)의 죄 없는 백성이 진실로 가련하게 됩니다. 또한 만약 이시애가 악독함으로 죄를 더하면, 역적이 이르는 곳마다 주·부(州府)를 불사르고, 이르는 곳의 병기를 싣고, 이르는 곳의 사졸(士卒)을 강압하여, 하루아침에 국경을 넘어 북쪽 오랑캐 땅으로 들어간다면, 앞으로 국경의 근심을 어찌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자광은 여름을 맞아 전선이 교착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임금에게 말씀드리고,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신(臣)이 망령되이 이르거니와, 장수가 된 자들이 부귀나 탐하고,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고, ‘이제 여름을 맞아 활의 힘이 약해졌고, 비가 많이 내려 강이 가로막고, 산천의 기세가 가파르고 험하고 초목이 무성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도, 경솔하게 싸울 수도 없다.’고 서로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만 홀로 여름이고 적은 여름이 아니며, 우리만 홀로 궁력(弓力)이 해이해지고 적은 활의 힘이 약해지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강이 막히고 적은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천이 험하고 적은 험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손무(孫武)는 말하기를, ‘승리는 빠르게 얻으라.’ 하였습니다. 대체로 보아 옛 선인들이 용병(用兵)을 할 때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들이 지체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유자광은 상소의 말미에 말을 덧붙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말이 서툰 사람의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미천하다 하여 내치지 마시옵소서. 신은 비록 미천하나 전쟁의 한 모퉁이에서라도 서서 이시애의 머리를 참(斬)하여 바칠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를 읽고, 도승지 윤필상에게 상소를 내려주며 유자광을 궁궐로 부르게 했다. 

 유자광은 다음날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세조를 알현하게 된다.

 사관은 갑사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 내용을 이례적으로 전부 실록에 남겼다. 또한 임금이 상소를 읽은 후의 반응을 상세히 기록하고 유자광의 인물평을 첨가하였다. 

 ‘유자광은 전 경주부윤 유규의 얼자이다. 행동이 용맹스럽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활쏘기를 잘하고, 경전과 역사를 알며 문장을 잘하였고, 기개를 숭상하였다.’ 

 이는 무오사화 이후의 실록에서 보이는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는 달리 매우 우호적인 인물평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두류산출간작가

감성에세이와 역사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연예인 '만담왕' 신불출 스토리를 발굴하였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야기인 '선비의 나라'를 집필중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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