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7)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7)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지에 오르고, 남이의 역모를 막아 재상이 되다
세조 14년 1월, 피부병이 심해진 세조는 정희왕후와 더불어 세자를 거느리고 온천 치료차 온양으로 거동하였다. 유자광은 그동안 훈련시켜온 총통군을 어가행렬의 양쪽에 호위하게 하여 행차를 더욱 장엄하게 하면서도 임금의 온양행궁 행차를 효과적으로 경호하였다.
유자광의 두 번째 벼락출세의 전환점은 세조의 온양행궁 행차에서 거행한 과거였다.
세조는 온양행궁에서 온천요양을 하면서, 예조와 병조에 별시(別試) 문무과를 치를 것을 지시하였다.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오를 때, ‘천출이다’, ‘과거 급제자가 아니다’하며 반대가 많았고, 병조에서도 관리들이 자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무과보다는 선비들이 중시하는 문과에 응시했다.
세조 14년 2월 15의 실록에 의하면, 유자광은 별시에 삼등 안에 들지 못해 낙방하였다.
그런데 세조가 유자광의 답안을 가져오게 하여 읽어 보고 말했다.
"유자광의 대책이 좋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합격시키지 않았느냐?”
과거를 주관한 신숙주가 나서서 아뢰었다.
"대책 속에 고어(古語)를 쓴 데다 문법도 또한 소홀하여, 이 때문에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비록 고어(古語)를 썼다 하더라도 묻는 본의(本意)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지 않겠는가?”
이에 다시 등수를 정해, 유자광을 장원으로 뽑았다.
유자광은 벼슬을 가진 채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므로 관례대로 특별 승급이 되었다. 세조는 즉석에서 유자광을 정 5품 병조정랑에서 정 3품 병조참지로 승진 임명하였다.
이로써 유자광은 갑사 신분에서 3개월 만에 병조정랑, 다시 5개월 만에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당상관은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대청(堂)에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를 가리키는 데서 나온 말로, 국왕과 같은 자리에서 조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정 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관은 이날의 일을 생생하게 실록에 남겼다.
"유자광은 첩의 아들이나 허통이 되어 과거 시험에 나갈 수 있게 하고, 또 특별히 장원으로 급제시키고 즉시 병조참지를 제수하니, 조정이 자못 놀라워하였다.”
세조 14년 여름 세조의 병은 갑자기 위중해졌다.
세조는 자신이 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세조는 임금 자리를 세자에게 물러주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가, 양위한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정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인정해 주었던 세조의 죽음은 유자광에게 비통한 충격을 가져왔다.
유자광의 벼락출세 세 번째 분수령은 남이의 역모를 막은 것이었다.
1468년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병조 참지 유자광이 밤중에 승정원에 나아가서 숙직하고 있는 승지에게 알렸다.
"신이 급히 주상께 계달할 일이 있습니다.”
임금이 유자광을 불러서 보니, 유자광이 아뢰었다.
"지난번에 신이 내병조(內兵曹, 궁궐에서 병조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에 입직하였더니 남이도 겸사복장으로 입직하였는데, 남이가 어두움을 타서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이제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아마도 간신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들은 개죽음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유자광은 말을 이었다.
“또한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수강궁(壽康宮, 훗날 창경궁으로 이름이 바뀜)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이라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주상이 반드시 창덕궁에 오래 머물 것이다.’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이는 어렵지 않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런 말을 내가 홀로 너와 더불어 말하였으니, 네가 비록 고할지라도 내가 숨기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내가 비록 고할지라도 네가 숨기면 내가 죽을 것이므로, 이 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말할 수 없다. 또 세조가 장정을 다 뽑아서 군사를 삼았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 나는 호걸이다.’ 하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려고 하자 이미 취했다고 말하며 마시지 아니하고 갔습니다.”
예종은 즉시 입직(入直)한 겸사복장 거평군 이복(李復)을 속히 입시하게 하여, 남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국왕의 호위를 책임지는 겸사복장은 복수(複數)로 임명하여 교대로 숙직하며 겸사복들을 인솔하여 궁궐의 경비에 임하였다. 남이는 이날 비번이었고, 거평군이 이날 궁에서 숙직하였다.
남이는 결국 한 밤중에 포승줄에 묶여 창덕궁 동쪽에 마련된 국문장인 수강궁의 후원에 끌려왔다. 남이는 거사가 탄로 났다는 것을 알았으나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버텼으나 함께 모의한 자들이 사실대로 말하여 어쩔 수 없이 역모를 꾀한 사실을 실토했다.
(참조: '남이장군은 참으로 억울하게 죽었을까 (총 4편)')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고 자헌대부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익대는 ‘보좌하여 받들다’는 뜻으로, 익대공신은 종묘사직을 지켜낸 공신이라는 뜻이었다. 자헌대부는 정 2품 재상의 품계이다. 유자광은 병조참지가 된 지 8개월 만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4년 뒤인 성종 3년에 종 1품 숭정대부로 승급하였다.
천출인 유자광은 갑사의 신분에서 병조의 정랑과 병조참지를 거쳐, 단숨에 재상까지 되었다. 경복궁 문지기에서 재상이 되기까지 1년 4개월이 걸렸다.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조선 최고의 벼락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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