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6)
너희 중에 유자광 같은 절세의 인재가 몇이나 있느냐
임금이 유자광을 병조정랑에 발탁되었다는 소식에 조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있는 사헌부에서 먼저 나섰다.
서경(署經)은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을 제정할 때 대간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였다. 비록 국왕이 관리의 임명을 지시하였더라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이 동의해 임명장에 서명을 해야만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때 대간은 해당자의 재능과 행실은 물론, 3대에 걸치는 집안 내력까지도 심사하였다.
세조 13년 9월 22일의 실록에 의하면, 사헌부 지평 정효항이 사헌부 전체의 의논을 가지고 세조에게 아뢰었다.
"사람을 저울질하는 관청인 전조(銓曹)의 낭관은 소임이 가볍지 아니합니다. 유자광은 유규의 얼자임에도, 전투에서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갑자기 병조정랑에 임명하셨는데, 병조정랑 자리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유자광의 출신은 첩의 아들로서 재주와 행실이 천박하고 용렬한데, 비록 관직에 허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병조정랑 자리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께서 귀천을 논하지 아니하시고, 현부(賢否)를 살피지 아니하시고, 예전의 사례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어제에 허통하여 벼슬길이 막힌 것을 허락하였다고 오늘에 정랑(正郞)으로 삼는다면,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
전조(銓曹)는 사람을 저울질(銓)하는 관청이라는 의미로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부서를 뜻했다.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를 통칭하여 전조라 하였으며 정조(政曹)라고도 했다.
세조는 정효항을 나무랐다.
"어찌해서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면 재주와 행실을 당연히 천박하고 용렬하다고 보느냐?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 과인은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너희들이 허통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였다고 핑계하느냐? 얼마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만 오래되지 않는다는 것이냐?"
정효항이 대답하였다.
"유자광의 마음과 뜻은 탁월하게 뛰어나 용렬한 자와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병조정랑에 임명하는 것은 도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유자광은 서얼이므로 당대는 안 되고, 세월이 흘러 그 자손은 임명하여도 괜찮을 것이옵니다."
뒤에 사간원의 사간(司諫) 박안성도 유자광의 일로써 와서 아뢰었다.
세조의 답은 단호했다.
"너희들이 유치하고 어리석으니, 어찌 시비(是非)를 알겠는가?"
사관은 사초(史草)에 다음 말을 덧붙였다.
‘서얼(庶孽)이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이 처음 있는 일이다.’
낭관은 조선시대 육조에 설치한 각 부서의 실무 책임을 맡은 정 5품 정랑과 그를 보좌하는 정 6품 좌랑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인사의 실무책임자로 관리를 선발할 때 배석하였고, 추천된 인물이 해당 직책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선발 명단에서 제외하는 권한도 있었다. 관리라면 누구나 가기를 바라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대사헌 양성지와 대사간 김지경이 나섰다.
두 사람은 함께 유자광의 병조 정랑 임명이 불가함을 상소로 아뢰었다. 9월 28일 실록은 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미 허통 하였으니 무엇이 불가(不可)하겠는가고 하신다면 신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시절에 조득인은 뇌물 받은 관리의 손자이지만 허통하여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오르게 허락하였으나 성균관의 유생을 훈육하는 교관인 학록(學錄)으로 옮길 때, 임명을 미루었습니다. 최근에 한승경이 화순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공신 하륜의 첩의 손녀사위이므로 수령에 마땅치 않다고 사헌부에서 아뢰어, 전하께서 곧 파직을 명하였으니 실로 유자광의 사례와 같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성균관의 학록과 수령은 병조의 낭관보다 직책이 가벼워도, 허통한 조득인이 학록이 되지 못하였고, 첩의 손녀사위인 한승경이 수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유자광은 첩의 아들이니 비록 허통 하였더라도 어찌 그를 병조의 정랑으로 삼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하루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조정을 높이시고 나라의 법을 공고하게 하소서."
세조는 대사헌과 대사간을 어전에 불러 말했다.
"경들이 세종 때의 고사(故事)를 들어서 말하는데, 이것은 세종 때의 일을 가지고 나를 곤혹하게 하려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진이를 세우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다만 사람을 얻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뿐인데, 어찌 귀천을 논하겠는가? 경들이 유자광같이 어질 수가 있겠는가?
과인은 유자광을 어질다고 하여 벼슬길에 허통 시켰고, 유자광을 허통한 것은 임금의 특별한 은혜인데, 과인의 특별한 은혜를 너희가 감히 저지하겠다는 말인가? 임금을 섬기되 너무 자주 간하면 욕이 되는 것이고, 친구와 사귀되 너무 자주 간하면 멀어지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말하면 내가 반드시 죄줄 것이니, 너희는 다시 말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고 물러가는 것이 가하다."
세조는 두 사람과 함께 사헌부와 사간원의 주요 관리들을 모두 불러 술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은 술을 마시는 양사의 관리들을 격려하였다.
"모름지기 고집불통이 필요하니, 만약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으면 일이 모두 해이해질 것이다. 너희들이 굳게 의견을 말하니, 매우 가상히 여긴다. 대간의 말을 무겁게 여기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인재를 쓰는 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조는 며칠 동안 계속된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서얼 출신 유자광을 병조의 정랑에 임명할 수가 있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급 무관이던 유자광은 3개월 만에 무신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정랑이 된 것이었다. 유례가 없는 벼락출세였다. 이때 유자광의 나이는 29세였다.
유자광은 태종이 서얼 차별법을 만든 이후, 서얼 출신으로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의 낭관에 임명된 첫 사례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서얼 차별은 조선 이전의 역사에도, 중국의 역사에도 찾기 어려운 조선 초기에 생긴 독특한 제도였다. 서얼 차별은 태종 때 법으로 명문화된 이후 첩의 자식인 서얼은 법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서얼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가문을 잇는 것도 금지하여 자신의 아들 중에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으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하였다. 한번 서얼이면 자손들도 서얼이 되므로 서얼의 수는 점차 늘어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조선의 반이 서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에서 서얼 차별 철폐를 위한 움직임은 언제나 실패하였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비로소 실현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더 풍부한 인재를 활용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국력을 쇠퇴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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