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강순의 휘하 장수로 압록강변인 국경으로 이동하였다.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 본거지를 공격하는데 유자광은 선봉에 섰다. 여진족은 방어선으로 목책(木柵)을 구축하여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며 저항하였다. 조선군도 화살로 응사했으나 여진족은 나무 울타리 뒤로 몸을 숨겨 소용이 없었다.
유자광은 방패를 든 병사인 팽배수를 집결시켰다. 팽배수는 팽배라고 불리는 원형 방패와 칼로 무장한 보병부대로 근접 전투의 핵심전력이었다. 유자광은 팽배수를 지휘하며, 적의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고 칼로 쳐내며 앞장서서 돌격했다.
드디어 유자광의 부대가 여진족의 목책을 무너뜨리며 돌파하자, 여진족은 크게 손상을 입고 후퇴하였다.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었다. 군사들이 양손에 방패와 칼을 높이 쳐들고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유자광은 귀가 불에 닿은 듯한 화끈함을 느꼈다. 비로소 살펴보니 찢어진 귀에서 피가 흘러 목을 타고 어깨까지 붉게 적셨다.
세조는 유자광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어의(御醫)를 보내 유자광을 치료하게 하였다.
세조는 유자광을 아꼈으나, 천민 출신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안타까웠다. 세조는 유자광에게 더 많은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 이시애의 반란군 토벌에 이어 여진족 정벌에도 종군시켰다.
세조는 유자광을 중용하면 나라와 사직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인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어린 세자를 생각할 때, 유자광과 이준, 남이 등 신(新) 공신들은 노회한 구(舊) 공신들에 둘러싸일 세자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의 토벌과 변방의 야인 정벌에 공을 세운 유자광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게 하고 싶었다. 세조는 유자광을 무인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정랑에 임명하였다.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발탁되었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유자광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미천한 몸으로 주상의 지극한 인정과 은혜를 입었으니, 죽어서라도 갚지 않는다면 어찌 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세조의 지시에 조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관리들은 깜짝 놀라 삼삼오오 모여서 이 일을 화제로 삼았다.
"얼자를 허통 시킨다는 교지(敎旨)의 먹물도 마르기 전에 병조정랑이라니?”
"서얼 차별법을 풀어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해도 병조의 낭관은 곤란하지. 더구나 병조정랑은 문과 급제자의 직책이지, 무인이 가는 자리도 아니지 않은가.”
"이조와 병조의 낭관(郎官) 자리는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책임지는 막중한 직책이야. 문과 급제자 출신 중에도 좋은 가문으로 재주와 행실이 반듯한 자를 골라 임명해 왔는데, 어찌 노비의 자식이 감히 병조정랑을 넘본단 말인가?”
낭관은 조선시대 육조에 설치한 각 부서의 실무 책임을 맡은 정 5품 정랑과 그를 보좌하는 정 6품 좌랑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인사의 실무책임자로 관리를 선발할 때 배석하였고, 추천된 인물이 해당 직책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선발 명단에서 제외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관리라면 누구나 가기를 바라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사헌부 감찰들도 한 자리에 모여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가 등청하는 지평 정효항(鄭孝恒)을 보고 몰려왔다. 정효항은 김종직이 승문원에서 함께 근무한 정효상의 형이었다.
"조정의 공론(公論)이 유자광의 병조정랑 임명은 만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사헌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헌부는 인사에 대해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정의 공론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서경(署經)은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을 제정할 때 대간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였다. 비록 국왕이 관리의 임명을 지시하였더라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이 동의해 임명장에 서명을 해야만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때 대간은 해당자의 재능과 행실은 물론, 3대에 걸치는 집안 내력까지도 심사하였다.
대사헌 양성지가 등청하였다. 양성지는 정효항과 사헌부 관리들의 격앙된 의견을 듣고 말했다.
"내일 주상께 사헌부 일을 보고드릴 예정인 정 지평이 사헌부의 전체 의견을 성상(聖上)께 아뢰어주게.”
정효항이 예를 올리고 물러나려 하자, 양성지는 말을 보태었다.
"성상의 심기를 너무 불편하게 하지는 말게나. 필요하면 사헌부 전체가 나서야 할 것이네.”
1467년 세조 13년 9월 22일.
정 5품 사헌부 지평 정효항이 입시하여 엎드려 절하고, 임금에게 사헌부 업무에 관한 보고를 마치고 이어서 아뢰었다.
"전하, 사헌부 전체가 얼자를 병조정랑에 임명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옵니다. 서얼을 어떻게 낭관에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정효항은 임금의 거친 반응에 어깨가 움츠려 들었으나 용기를 내어 답했다.
"사람을 저울질하는 관청인 전조(銓曹)의 낭관은 소임이 가볍지 아니합니다. 유자광은 유규의 얼자임에도, 전투에서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갑자기 병조정랑에 임명하셨는데, 병조정랑 자리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유자광의 출신은 첩의 아들로서 재주와 행실이 천박하고 용렬한데, 비록 관직에 허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병조정랑 자리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께서 귀천을 논하지 아니하시고, 현부(賢否)를 살피지 아니하시고, 예전의 사례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어제에 허통하여 벼슬길이 막힌 것을 허락하였다고 오늘에 정랑(正郞)으로 삼는다면,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
전조(銓曹)는 사람을 저울질(銓)하는 관청이라는 의미로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부서를 뜻했다.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를 통칭하여 전조라 하였으며 정조(政曹)라고도 했다.
세조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낮은 어조로 정효항을 나무랐다.
"어찌해서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면 재주와 행실을 당연히 천박하고 용렬하다고 보느냐?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 과인은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너희들이 허통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였다고 핑계하느냐? 얼마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만 오래되지 않는다는 것이냐?”
정효항은 임금이 유자광을 절세의 인재라고 극찬하자, 입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유자광의 마음과 뜻은 탁월하게 뛰어나 용렬한 자와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병조정랑에 임명하는 것은 도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유자광은 서얼이므로 당대는 안 되고, 세월이 흘러 그 자손은 임명하여도 괜찮을 것이옵니다.”
세조는 쇳소리를 내었다
"지금은 안 되고 그 자손은 된다? 가소로운 말이다. 인재는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이미 결심이 섰다. 다시 거론하여, 과인의 말을 거스르지 말라.”
정효항은 임금의 경고에 기가 죽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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