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역사) 이야기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유자광 난세에 기회를 얻다 (9)

by 까망잉크 2022. 8. 11.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난세에 기회를 얻다 (9)

 

사람의 운명은 태어나면서 정해져서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는 그런 것인가

 

by두류산Jul 22. 2022

 

정효항이 풀 죽은 모습으로 사헌부에 돌아오니 사헌부 관원들은 임금이 강경한 입장임을 알아차렸다. 사헌부 관리들은 정효항을 위로하였다.

 "사헌부가 함께 연명하여 주상께 상소를 올려, 이번 일이 바로 잡히도록 힘을 다해 말해야 합니다.”

 대사헌 양성지는 정효항의 진언을 단칼에 자른 임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사헌부 단독으로 나서는 것보다 사간원과 함께하는 것이 좋겠어.’

 양성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사간 김지경을 찾았다. 양성지는 사간원이 이번 일에 침묵하며 간(諫)하지 않은 것은 김지경이 임금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지경은 ‘동방의 제갈량’이라고 불릴 정도로 꾀가 많은 대사헌 양성지가 직접 사간원으로 건너오자 무슨 제안을 할지 긴장하며 맞았다. 양성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자광의 인사로 젊은 대간들의 분위기가 격해져 있소.”

 "사간원도 이번 일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정의 인사에 대해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는 일은 결국 우리 대간이 할 일이 아니겠소.”

 김지경도 사간원 관리들의 반발을 아는 터라, 양성지의 말에 동조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兩司)가 힘을 합쳐 이번 일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두 수장(首長)은 임금의 지시를 바꾸고자 양사가 합의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양사 관원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논의하였다.  

 "일개 갑사 신분에서 3개월 만에 병조정랑이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입니다.”

 "하루아침에 분수에 넘치는 출세도 문제지만, 병조의 정랑은 대과 급제자도 함부로 차지할 수 없는데, 감히 얼자가 얼씬거릴 자리는 아닙니다.”

 "비천한 얼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권위가 서지 않을 터인데 누가 그를 따르겠습니까?” 

 정효항이 좌우를 번갈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주상이 우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사간원의 사간(司諫) 박안성이 정효항의 말에 동의했다.

 "옳은 말이오. 주상의 성정(性情)이 엄하시긴 하나, 유자광 같은 서얼이 낭관을 차지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으면 조정이 양사(兩司)를 우습게 볼 것이오.”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양사 관원들의 의견이 모이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두 수장은 양사를 대표하여 임금께 아뢸 사람을 정했다. 

 "양사가 논의한 것을 종합하여 임금께 아뢸 사람으로는 사간원에서는 정승의 자제인 박 사간이 좋을 듯합니다.”

 양성지는 김지경의 영리한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사헌부는 지난번 주상전하께 이 문제를 아뢴 정 지평이 함께 입시하도록 하겠소.”

 

 세조 13년 9월 23일, 사헌부를 대표하여 정 5품 지평 정효항과 사간원을 대표하여 종 3품 사간 박안성이 어전에 나아와 유자광의 병조정랑 임명이 불가함을 말씀드렸다. 정효항이 먼저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자광은 첩의 아들입니다. 전하께서 천지와 같은 도량으로 특별히 허통 하도록 하였으니 성상의 은혜가 이미 지극합니다. 어찌 병조의 낭관에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박안성이 정효항의 말을 지원하였다.  

 "병조의 정랑 자리는 나라와 군의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직책입니다. 이러한 관직에 오를 자는 고르고 고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반드시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 직책을 맡게 하고, 가문과 재주와 행실을 세세히 살펴 고르는 것이 나라의 법입니다. 사람은 귀천(貴賤)이 있고, 벼슬에도 존비(尊卑)가 있으니, 서얼 출신을 이런 막중한 지위에 올려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정을 높이고 명분을 지키려는 까닭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세조는 두 사람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희가 생각이 이토록 짧고 어리석으니, 어찌 옳고 그름을 알겠는가? 당장 물러가라!”

 임금의 호통 소리에 간이 떨어지는 듯하여, 두 사람은 누구도 더 이상 말을 더하지 못하고 어전에서 물러나왔다.

 

 유자광은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수군거리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직접 임금에게 병조정랑 임명을 철회하라고 청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우려는 하였지만, 몸속 깊숙한 곳에서 불덩이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나면서 정해져서, 어떡하든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유자광은 임금이 대간들에게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들었다.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 나는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유자광은 홀로 부르짖었다.

 "전하, 너무나 황공하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늘 같은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유자광은 임금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붓을 들었다.

 "천한 몸이 성상(聖上)의 은혜를 받아 갑사에서 갑자기 병조정랑까지 오르니, 뭇사람의 비방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분수를 헤아리며 바라건대 내리신 명을 거두시어 대간의 논란을 그치게 하소서. 신은 미천한 출신으로 재능도 공도 없으면서 조정에 욕이 되고 있으니 무슨 마음으로 편하게 자리를 보존하겠습니까? 성상의 공평하고 밝으신 다스림에 누(累)가 될 뿐입니다. 보잘것없고 천한 신(臣) 때문에 조정이 편하지 않으므로, 묵묵히 있기가 송구스러워 죽음을 무릅쓰고 사직을 청합니다.”

 

 유자광은 붓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태어나는 순간 양반, 양인, 천민으로 신분이 정해지니,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참으로 바꿀 수 없는 그런 것인가?’

 유자광은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넓게 펼쳐진 상소문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사직을 원한다고 쓴 글씨들이 하나 둘 일어나더니 하얀 종이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빠져나온 글씨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공중을 떠다녔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자광은 눈을 번쩍 뜨고 상소문을 움켜쥐었다. 손으로 구겨서 방구석에 내동댕이치며 부르짖었다.   

 "어찌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삶만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필시 나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다. 피하지 말고 가보아야 하리라!”

 

두류산 출간작가

감성에세이와 역사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연예인 '만담왕' 신불출 스토리를 발굴하였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야기인 '선비의 나라'를 집필중입 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