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숨은 그림 찾기]
이방인 눈에 비친 시골 결혼 잔치의 주인공
입력2022.09.09. 오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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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 ‘시골 결혼 잔치’. 1921년. 목판화. 20.4×36㎝
아들이 결혼을 했다. 당일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결혼식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개었다. 거리는 마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물청소를 한 듯 말끔했다. 하객들에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겠구나 싶어 다행스러웠다.
결혼은 당사자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혼주들도 아침 일찍 식장에 도착해 메이크업을 하고 올림머리를 했다. 3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으려니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식이 진행되기 30분 전부터 하객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일가친척들과 친구와 지인들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겠는가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전주에서, 춘천에서, 대전에서, 강릉에서 오로지 이 결혼식을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준 그들의 정성이 새삼 특별해 보였다. 결혼은 당사자와 혼주가 중심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젊은 한 쌍의 앞날을 축하해주러 온 하객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우루루 몰려들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준 그들 덕분에 결혼식은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나는 시골동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풍경은 큰집 제사와 동네 잔치다. 큰집 제사는 과일과 떡, 고기, 술 등을 제사상 가득 차려놓고 정장을 한 남자들이 한밤중에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끝없이 절을 하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계집아이'였던 관계로 제사를 지내는 안방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빨리 제사가 끝나 형형색색 차려진 제사상의 음식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참았다. 종갓집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나이에 큰집은 큰 잔치가 많아 큰집인 줄 알았다. 그만큼 큰집에서는 제사와 잔치가 많았다.
큰집 외에도 동네에서는 시시때때로 잔치가 벌어졌다. 규모가 작은 시골 동네라 어느 집에서 생일잔치를 벌이는지 어느 집에서 돌잔치를 치르는지 훤히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시골 결혼식은 동네 잔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잔치는 회갑 잔치와 결혼 잔치였다. 특히 결혼 잔치는 푸짐한 음식과 함께 볼거리까지 갖춰 가장 기대되는 행사였다. 그날이 그날 같은 무채색의 일상에 원삼에 족두리를 하고 연지곤지 찍은 신부를 보는 것은 신나고 설레었다. 동네 사람들의 짓궂은 농담을 참아가며 쩔쩔매던 신랑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지만 결혼 잔치의 주역들은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었다. 큰집, 작은집 일가붙이들은 물론 산천댁, 방충안댁, 효천댁, 혜산댁으로 부르던 동네 아낙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아낙들은 부엌과 부엌 바깥에 쭈그리고 앉아 고기를 삶고 과일을 씻고 솥뚜껑에 전을 부쳤다. 동네 아이들은 전 부치는 기름 냄새에 끌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엌 앞을 기웃거렸다. 어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고 아이들은 신나서 뛰어다니던 모습은 어느 집이든 상관없이 결혼 잔치마다 항상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엘리자베스 키스(1881~1956)가 그린 '시골 결혼 잔치'는 내가 어린 시절 동네 결혼식에서 봤던 그 모습을 옮겨놓은 듯하다. 그만큼 생생하고 현장감이 살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사진으로 남긴 조선 풍경 중 '혼례 광경'과 비교해보면 그녀가 얼마나 현장을 잘 살렸는지 실감 난다. 집안 마당에는 차일을 쳤고 그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신부가 앉아 있다. 신부 뒤에는 꽃과 새를 그린 10폭병풍을 펼쳤다. 병풍은 잔칫집의 필수품으로 산란스러운 뒷공간과 정갈한 앞공간을 분리함과 동시에 병풍 앞에 앉은 인물을 돋보이게 한다. 신부는 원삼족두리의 예복을 입고 두 손을 맞잡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다. 신부 옆에는 두 여자가 앉아 있다. 신부를 거들어주는 수모(手母)다. 신부 앞에는 잔칫상이 차려져 있고 떡과 과일과 과자 등이 층층이 올려져 있다. 잔칫상에는 아직 더 올려야 할 음식이 있는 듯하다. 한 아낙이 떡그릇을 놓으려고 하자 남정네가 상을 정리한다. 잔칫상 앞의 놋그릇에도 색색의 떡을 고였다. 음식의 규모만 봐도 오늘의 혼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시골 결혼 잔치'를 돋보이게 하는 점은 그림 속에 등장한 각 인물의 특징에 있다. 아낙들은 머리에 흰 천을 둘렀고 흰옷을 입거나 검은색 무명치마를 둘렀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다양한 색의 옷을 입었다. 병풍 뒤에 서서 포대기에 업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젖을 먹이는 아낙, 창에 팔을 기댄 뒷모습의 아낙, 머리에 인 광주리를 내려놓는 아낙과 등에 아이를 업은 아낙들은 모두 젖가슴을 드러내었다.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물지게를 진 아이, 머리에 항아리를 인 아이, 기둥 뒤에 숨어 잔칫상을 구경하는 아이, 병풍을 만지작거리거나 잔칫상의 과자를 만지는 아이, 뒷짐을 진 채 선 노인 등도 잔칫집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필수 요원들이다. 작가는 댕기를 한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그림 앞에 배치함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이 병풍 앞의 주인공으로 향하게 했다. 그림 좌측 앞쪽에 쭈그리고 앉은 사내아이는 어떠한가. 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 잔칫집에 갔던 나의 기억이 겹쳐진다. '시골 결혼 잔치'는 시끌벅적하고 혼잡하고 들뜨면서도 유쾌한 결혼식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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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엽서. ‘혼례 광경’. 14.2×9㎝. 부산광역시립박물관
키스의 그림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그림을 볼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시골 결혼 잔치' 같은 결혼식 풍경을 그린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너무 흔해서 소재로서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김홍도 같은 풍속화의 대가도 '시골 결혼 잔치' 같은 흥분된 웃음소리를 그리지 않았다. 김홍도가 혼례와 관련해 그린 작품은 혼례식 장면이 아니다. 신랑이 장가가기 위해 기럭아범을 앞세워 신부 집으로 향하는 행렬이다. 이것은 특정 사대부의 일생을 몇 가지 단계로 압축해 표현한 '평생도'의 한 장면에 포함된 부분이다. 이후 조선시대의 '평생도'는 거의 김홍도의 혼인식 장면을 모본으로 하여 동어반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유의 그림은 전적으로 신랑 측 인물들만 그리고 신부 측을 제외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혼례식 장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키스의 '시골 결혼 잔치'가 더욱더 소중하다. 그녀는 특히 '시골 결혼 잔치'를 비롯해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신부의 모습을 그린 '신부', 신부가 꽃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결혼식에 참석한 여자 하객을 그린 '결혼식 하객' 등 결혼식 장면을 많이 그렸다. '신부 행차'에서는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덮어놓은 것은 물론, 청사초롱을 든 사람까지 꼼꼼하게 그려 그녀가 대상을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결혼식을 예식장에서 치르기 때문에 '시골 결혼 잔치'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또한 엘리자베스 키스 같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우리의 과거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결혼식의 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류화가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일본 도쿄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언니 내외의 초청으로 일본에 첫발을 디딘 후 1919년 3월 28일에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라 분위기가 매우 침통하고 우울했다. 그녀는 1936년까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풍속화를 그렸으며 그 작품들을 모아 1921년과 1934년에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방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그녀는 두 노인이 책을 읽으며 담소하는 모습, 장기를 두는 한가로운 일상, 장옷을 입은 여인, 가마를 타고 가는 여인, 서당 풍경, 우산 모자를 쓴 노인 등 한국의 사라져가는 전통을 아쉬워하며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다. '과부'라는 작품에서는 "그녀가 일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고 하면서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라고 평가했다. 덧붙여서 "일본인들은 갖은 만행을 다 저질렀는데 길을 가다가 한국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일본 경찰이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고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라고 고발했다.
그녀가 그린 조선 풍경은 그녀의 언니 엘스펫 키스 로버트슨 스콧의 글과 함께 '올드 코리아(Old Korea)'(책과함께)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녀는 책을 출판하게 된 목적에 대해 "이 그림을 통해 한국인들의 의상, 집들의 모양, 풍습, 여러 가지 일반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애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올드 코리아'는 재미교포 송영달에 의해 한국에 소개되어 비로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키스와 송영달이 아니었더라면 '시골 결혼 잔치' 같은 흥겨운 장면을 우리는 영영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홍도도 그리지 않았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녀는 조선의 화가들에게 오랜 세월 버림받고 무시당했던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그 외 섬나라 등을 방문해 그림으로 남겼다.
아들의 결혼식이 끝나자 마치 등에 진 쌀가마니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결혼식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컸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소중한 순간이 흘러가고 추억이 되었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저 통과의례로만 여겼던 결혼식이 단순히 빨리 끝내야 할 형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귀하고 소중한 순간이라는 생각도 절감하게 되었다. 추석도 설도 제사도 생일날도 그럴 것이다. 지나고 나면 그때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과 다시는 함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유일한 시간 속을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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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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