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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14] "일가족 몇 달치 쌀값 들여가며 코 수술

by 까망잉크 2022. 11. 9.

[김명환의 시간여행] [14] "일가족 몇 달치 쌀값 들여가며 코 수술, 젖 높이기가 웬 말이냐"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4.13 03:00
 

서울 강남 유명 성형외과 원장이 '유령 수술'을 한 혐의로 지난주 기소됐다. 환자에겐 자신이 수술할 것처럼 말해 놓고 환자가 마취 상태에 빠진 사이에 치과의사 등이 대리 수술하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오늘의 과도한 성형 열풍을 틈탄 신종 장삿속처럼 아는 사람도 있지만, 마취 상태를 이용한 '유령 의사'의 성형수술은 1960년대부터 있었다. 서울 도심의 모 의원 원장은 1968년 초부터 1년 넘도록 쌍꺼풀 등 성형수술을 받으러 온 여성들을 마취시켜 놓고 정작 수술은 병원 조수에게 시켰다가 구속됐다. 이렇게 수술받은 사람들 중엔 콧대가 내려앉는 등 부작용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1970년 봄엔 서울의 치과의사가 무려 1000여명에게 코 높이기 등 성형수술을 했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싼값으로 예뻐지려는 사람들을 노린 무자격자의 이른바 '야매' 성형수술 사건은 일일이 꼽기도 힘들 정도다.

1962년의 성형 열풍을 다룬 신문 기사. 코 높이기와 쌍꺼풀 수술 전후 사진을 싣고‘멀쩡한 눈에 생채기를 내고, 온전한 코에 산마루를 만드는 게 유행’이라고 소개했다(조선일보 1962년 11월 18일 자).

광복 직후엔 극소수 부유층만 하던 미용 성형이 조금씩 대중화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다. 1962년 신문엔 '미인제조공장(성형외과)마다 예뻐지려는 욕망이 솟구치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한 성형외과 원장은 "여성 환자 중 여대생이 70%나 된다"고 전했다(조선일보 1962년 11월 18일 자).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웬만한 집의 한 달치 쌀값이 들어가는 쌍꺼풀 수술이 웬 말이냐"는 비판이 나왔다. '젖 높이기'는 '30분에 1만원을 잡아먹는' 가장 호화판인 수술로 꼽혔다. 1967년엔 미용 수술을 하는 병원이 서울에서만 약 40곳으로 늘어났다.

성형수술 붐에 대해 사법 당국은 갈팡질팡 대응했다. 치과의사가 성형수술한 사건이 일어나자 검찰은 의사를 재판에 넘겼지만 1972년 2월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애초에 의료법상 의료 행위에 성형수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면허자의 의료 행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1973년에 의료법이 개정돼 '성형외과'가 독립 진료 과목으로 추가됨으로써 이런 혼란이 사라졌다. 1975년 2월엔 최초의 성형외과 전문의 23명이 배출됐다. 성형은 추녀를 '양귀비 이상'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잘못되면 '수준급 미인을 마귀할멈으로 변신'하게 하여 불행의 씨가 됐다. 성형수술 한 뒤 얼굴이 비틀어졌다고 고민하던 27세 청년이 자살했고, 수술 부작용으로 코가 퉁퉁 부어오른 20대 여성은 머리 깎고 출가해 비구니가 되기도 했다.

젊은 여성은 예뻐 보이려 수술하고, 청년은 취업을 위해, 중년은 젊어 보이려고 병원을 찾았던 것도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닮았다. 하지만 초기 성형외과 의사 중엔 환자들이 여기저기 고쳐 달라고 아무리 요구해도, 안 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서면 거부하는 일이 꽤 있었던 듯하다. 1974년 어느 대학 성형외과 과장은 가슴이고 얼굴이고 무조건 수술해 달라는 여성들을 설득하느라 소동을 벌이며 진료실의 하루가 저문다고 신문 기고에서 밝혔다. 1979년 또 다른 성형 전문의는 막무가내 성형을 요구하는 환자에게 '자연보호'까지 들먹였고 나중엔 설득에 지친 끝에 악에 찬 소리까지 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오늘날 코 고치러 온 여성에게 "할인해 줄 테니 턱까지 깎으라"고 권한다는 일부 성형외과의 장삿속과는 사뭇 달랐던 것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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