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여사가 말하는 ‘나와 全斗煥 대통령’ 〈하〉 청와대, 백담사, 그리고 그 후…
“백담사 첫날 밤, 대입 앞둔 막내 생각하며 잠 못 이뤄”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 “장영자 사건 때 남편에게 ‘대통령 끝나실 때까지만이라도 헤어져 있자’고 말해”
⊙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 입었지만 컬러TV 화면에 실제보다 화려하게 비쳐”
⊙ 전두환,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자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
⊙ “제2부속실, 2급 비서관 한 명, 5급 행정관 한 명으로 운영”
⊙ “백담사 시절 맛있는 음식 챙겨 들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주신 국민들,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동네 아주머님들 고마워”
⊙ “검찰, 손주들이 키우던 진돗개, 결혼 패물까지 압수”
⊙ “‘전 재산 29만원’은 검찰이 추징해 간 휴면계좌의 이자를 언론이 왜곡한 것”
⊙ 전두환, “政敵들에 의해 악용당하는 걸 두려워해 기록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 입었지만 컬러TV 화면에 실제보다 화려하게 비쳐”
⊙ 전두환,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자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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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담사 시절 맛있는 음식 챙겨 들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주신 국민들,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동네 아주머님들 고마워”
⊙ “검찰, 손주들이 키우던 진돗개, 결혼 패물까지 압수”
⊙ “‘전 재산 29만원’은 검찰이 추징해 간 휴면계좌의 이자를 언론이 왜곡한 것”
⊙ 전두환, “政敵들에 의해 악용당하는 걸 두려워해 기록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사진=주민욱 씨영상미디어 기자
1980년 8월 27일, 전두환(全斗煥)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고 서교동 사저로 떠난 지 열흘 만이었다. 당시 전 대통령의 나이는 쉰 살, 이순자(李順子·83) 여사는 마흔두 살이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문(軍門)에서 땀과 열정을 바쳤던 남편 전두환을 따라 이순자 여사는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 전업주부로 살아오시다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하셨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다.
“보통 가정의 전업주부가 그렇듯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연설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카메라 앞이나 대중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극도로 긴장해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영부인은 수습기간도 롤 모델도 없는 역할이었다.”
— 그렇다고 영부인의 역할을 사양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더군다나 임기 내내 제2부속실을 2급 비서관 한 명, 5급 행정관 한 명, 이렇게 두 명만을 두고 운영했기 때문에 행사가 확정되면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연설문 초안과 행사내용 자료들을 전달받으면 여기저기 쉬어갈 곳, 높낮이가 필요한 곳을 표시해가며 열심히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행사장에서 연설문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어느새 등에는 진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조언자 없이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길을 택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마흔두 살에 첫 해외여행
— 1981년 1월, 전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에 미국을 국빈 방문하셨다.
“5공화국 정부의 개방화 정책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만 해도 공직자 부인의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40년 전 국민소득이 겨우 1800달러(1981년 GNI)였던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남편이 장군 진급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라 형편이 조금 나아져 여름휴가가 허락됐던 거다. 이듬해 여름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별천지 같았다.”
— 한미정상회담 준비는 어떻게 했나.
“장관들과 수행원들이 12년 만에 성사된 한국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실수 없이 준비해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도 내내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나날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접견 인사 자료’부터 ‘만찬 자료’까지 모든 자료를 마치 수험생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 회담 분위기는 어땠나.
“1980년 2월 2일 오전, 레이건 대통령과 상견례를 겸한 단독회담을 가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먼저 땅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졌고, 그분은 군사 전문가답게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설명해나갔다고 하더라. 이때 레이건 대통령은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지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주한미군 철수는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분에게 말했다. 오찬장으로 향하는 그분은 고무돼 있어선지 표정이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나카소네와의 우정
— 당시 사진을 보면 오찬장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팔짱을 끼고 이동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경쾌한 목소리로 ‘제가 오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영부인님’이라고 하시며 ‘나도 취임(1월 20일)한 지 보름밖에 안 돼 화장실을 겨우 찾는다’고 조크하셨다. 검은 정장에 푸른빛 넥타이를 맨 노신사, 레이건 대통령이 왼팔을 내밀며 정중히 건네는 말에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의전(儀典)과 관련해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 낯선 남자의 팔짱을 낀다는 것이 생소하지는 않았나.
“앨범을 보면, 거절하는 것이 더 결례인 것 같아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쓰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레이건 대통령이 오찬 도중에 ‘영부인께서도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셨는데, 미국 방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현안이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였기에 그가 한국의 안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지금 접견실에 걸려 있는 사진처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아래 레이건 대통령 내외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섰다. 두 정상은 마치 백년지기(百年知己)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양국의 새로운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 레이건 대통령, 나카소네 총리, 전 대통령은 당시 각각 70세, 63세, 50세로 나이 차이가 컸는데,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것 같다.
“세 분은 나이를 초월해 교류를 이어갔다. 퇴임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나카소네 총리는 치매 때문에 사회생활을 일찍 접은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우리 부부가 백담사에 있을 때는 따뜻한 내복과 고급 원단인 비쿠나로 지은 옷, 레코드를 보내주셨고, 남편이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올 때는 도쿄 ‘히노데(日の出) 산장’에 초대해주셨다. 그곳에서 우리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식수한 나무 옆에 나란히 기념식수를 했다. 얼마 전 그분의 아드님인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弘文) 참의원 의원이 결혼을 앞둔 아들 나카소네 야스타카(中曾根康隆) 중의원 의원과 함께 연희동에 들렀다.”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 취임한 지 1년 만인 1981년 8월에 사촌동생이 구속되는 등 이때부터 친인척 관련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주변의 작은 실수 하나라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국정에 임했다. 그분은 어렸을 적 서당에 함께 다녔던 사촌동생을 구속시켰다. 사기꾼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한국노년복지자조회 임원이라는 감투를 얻어 쓴 채 실컷 이용당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법 앞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며 법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분은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라며 자책했다. 자신이 대통령만 되지 않았다면 감방은커녕 일생 파출소 유치장 구경 한 번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사촌동생을 구속시킨 사람이 됐다면서. 그이는 일과 후 혼자 있을 때면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괴로워하실 숙부를 생각하며 몹시 참담해했다.”
— 1982년 5월 건국 이래 최대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張玲子)와 이철희(李哲熙)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들이 기업으로부터 편취한 어음 액면가만 7111억원에 달했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표방하는 전두환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다. 그 얘기는 친정 여동생을 통해 처음 들었다. 내 측근을 사칭하는 한 여자가 서울 한복판 특급호텔 한 층을 통째로 쓰면서 큰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나의 작은아버님 재혼 부인의 여동생이고, 첫 결혼에 실패하고 3공화국의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이철희라는 사람과 ‘사파리 클럽’이라는 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거다.”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전 대통령께 말씀을 드렸나.
“사실을 알렸고, 청와대는 즉각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얼마 후 궁금해하는 내게 조사 결과를 설명해주던 그분은 한동안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보, 오늘 보고한 사람이 아주 묘한 소리를 한마디 합디다. 시중에 퍼진 소문이라는데, 장영자라는 사람 뒤에 당신의 작은아버지 이규광(李圭光)씨가 있고, 또 그 뒤에는 청와대와 민정당이 있는데, 우리가 그 장씨를 통해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거요.’ 그분의 이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진 여사께서 전 대통령께 헤어지자고도 하셨다면서요.
“사기 행각을 벌인 그 여자가 작은아버지의 처제라고 하니 무력감(無力感)이 몰려왔다. 남편에게 대통령 끝나실 때까지만이라도 헤어져 있자고 했다. 정말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혼, 아니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분은 직원들에게 ‘청와대와는 단연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 소신을 갖고 원칙대로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5월 들어 드디어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구속됐고, 구속자 중에는 작은아버지도 포함돼 있었다. 장영자는 자신의 탐욕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많은 성실한 사람을 파산시켰고, 그들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화상을 남겼다.”
“남편, 軍 시절부터 부부 동반 좋아해”
— 5공화국 시절 TV 뉴스 등에 여사께서 자주 등장했다.
“그분은 군 시절부터 남자들만의 모임보다 부부 동반, 가족 모임을 더 좋아했다. 그리 하는 게 여성에 대한 올바른 대접이라는 게 그분의 나름 생활철학이기도 했다. ‘주부들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겠소. 사람을 많이 만나 내가 직접 협조를 구하려고 해도 장소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어렵소. 그러니 힘들더라도 따로 사람들을 만나 협조를 부탁해보시오’라고 하니 돕지 않을 수 없었다.”
— 전 대통령의 이런 생각이 여성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분과 함께 지방 출장이든 어디든 가게 됐을 때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이 되더라. ‘혹 실수라도 저질러 대통령의 위신을 실추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강박감이 몰려와 병이 날 지경이었다. 양장 차림을 하면 살이 빠져 왜소해진 내가 더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을 주로 입었다. 한데 때마침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열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버렸다. 텔레비전 속의 내 존재는 대통령의 조용한 내조자가 아닌, 사치스럽고 화려한 대중스타로 내비쳤다. 이웅희(李雄熙) 공보수석을 만나 참석 행사 횟수를 줄이고, 부득이 참석하더라도 가급적 뉴스 화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고 부탁드렸다.”
— 여사님께서 모 여배우를 질투해 미국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살다 보면 좌절과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인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라는 대통령 부인이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는 못할망정 오해와 비웃음, 악성 추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배우 장모씨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각하가 그녀를 좋아해서 내가 그녀의 자궁을 적출했기 때문이란 루머도 퍼졌다. 내가 속으로 ‘내가 정말 능력자네…’ 이런 생각도 했다(웃음).”
“그분의 폭포수 같은 눈물 처음 봐”
— 우리 국민들은 미얀마(당시 버마) 하면 1983년 10월 9일 발생한 북한의 아웅산묘소 폭탄 테러를 떠올린다. 폭파 순간 영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셨나.
“랑군한글학교 학생과 학부모 초청 담소 시간을 갖고 있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급하게 흘려 쓴 글씨로 ‘각하께서 행사를 중단하고 돌아오시니 영부인께서도 행사를 마무리해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각하께서 공식 행사를 중단했다는 전갈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황급히 학부모들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경호관의 뒤를 따랐다. 경호관은 영빈관 별채로 가고 있었다. 별채의 구석방에 도착하니 그곳에 그이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 그 긴박한 상황에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상황을 지휘했나.
“그때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이 그분에게 ‘수행원들이 잇달아 도착한 뒤 태극기를 단 이계철(李啓哲) 대사의 승용차가 도착하자 테러범들은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오판하고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던 그분의 눈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말할 수 없이 애통하고 참담한 가운데에도 그분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김병훈 의전수석, 황선필 공보수석, 장세동 경호실장 등 살아남은 세 사람의 공식수행원을 불러 ‘국화계획을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오게 하여 순국자의 유해와 부상자를 긴급 후송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발생 7분 만에 내린 조치였다. 그 황망하고 긴박한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아남은 세 분 수행원에게 비상약으로 준비해온 청심환을 건네는 일뿐이었다.”
— 귀국 후 전두환 대통령은 어떠했나.
“한동안 그분은 아끼고 의지하던 인재들을 잃은 슬픔으로 밤에도 일어나 혼자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은 새벽에 홀로 비서실을 찾아가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5공화국의 쟁쟁한 경제팀
1988년 2월 24일자로 퇴임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청와대 직원들이 전달한 치적 액자엔 ▲최초의 단임 및 평화적 정부 이양 실현 ▲정상외교로 세계 속의 한국 부각 ▲소득배증과 10대 무역대국으로의 부상 ▲한 자릿수 물가와 흑자경제의 실현 ▲올림픽 유치와 아주대회의 성공 ▲자주방위산업체제의 확립 ▲국민연금과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 ▲문화시설의 확충과 독립기념관 건립 등이 적혀 있다.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출장거리는 국내 927회(12만7140km), 국외 7회(72일, 16개국, 16만5734km)였다.
— 국민들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제라고 생각한다.
“보안사령관 시절 ‘경제학 선생님’으로 만난 경제기획원 출신 김재익(金在益) 수석에 이어 사공일, 박영철(朴英哲), 김기환(金基桓) KDI 원장을 비롯한 쟁쟁한 경제팀이 살림을 꾸린 덕분이다. 그분은 경제관료를 쓸 때도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도록 경력 관리를 해주셨다. 그분이 달성한 경제 분야 성과라면 단연 ‘한 자릿수 물가,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 외채상환,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이 아닐까 싶다. 그분의 재임 기간 우리나라는 물가는 안정되고 경기는 호황을 누렸고, 국민들은 그동안 고통 분담에 동참한 대가를 나눠가질 수 있었다.”
6·29의 이면
—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냈다고 말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1987년 6월, 당시 연일 계속되는 격렬한 대규모 집회를 통해 국민 대다수가 직선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남편은 내각제 개헌을 선호했던 자신의 고집을 꺾고, ‘직선제 개헌의 완전 수용’과 ‘가능한 민주화 조치의 단행’이라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 6·29선언도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분이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은 노 후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민정당 총재 자격으로 내각제를 홍보하고 있던 노 후보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분을 만날 때까지도 직선제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지 그분의 돌연한 제안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다. 이틀의 시간을 두고 직선제 수용의 불가피성과 직선제를 받아들인 후의 선거에서도 노태우 후보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갔다고 한다. 마침내 6월 19일 그분은 노 대표의 결심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
— 결과적으로 모든 공(功)이 노태우 대표에게 돌아갔는데….
“그분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비롯해 야당과 국민이 요구하는 모든 민주화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감한 구상을 책임지고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과실’은 노 대표에게 양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분 자신이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심판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자신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노 후보가 국민과 야당, 언론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공약을 발표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물아홉(1959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그분답게 이번에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정당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해도 될 영광과 찬사를 모두 친구 노태우에게 주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생각했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고.”
—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여사님께서 전 대통령을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인기 없는 정책을 소신 있게 채택해 끝내는 국민소득을 두 배로 올려놓은 남편, 이 나라 민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기꺼이 꺾은 남편이 퇴임 후 30년 동안 박해만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너무 홀대한다 싶어 평소 소신을 말했던 것뿐이다. 윤석열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냈다고 이야기하셨다가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기억이 났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을 닮아 헛소리를 하고 있다면서 몰아붙이니, 내가 어떤 근거로 남편이 민주화의 아버지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자서전을 보면, 국회 증언을 끝낸 1990년 1월 3일 무렵 박근(朴槿) 전 유엔대사가 전 대통령을 찾아와 대화한 내용이 나오는데, 김영삼씨의 말이 충격적이다.
“박근 대사가 교회에서 김영삼씨를 만났는데, 6·29 같은 조치를 노태우 대표가 아닌, 자신과 손잡고 했더라면 보호를 받았을 텐데, 노 대표에게 주어 이렇게 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박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씨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백담사에서 겪은 고초나 지난 31일(1989년 12월 31일) 증언대에 서서 당한 수모 같은 것은 면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당시 내 소신은 나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내가 만든 당이나 함께 일한 동지들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국가 미래만을 위해 소신을 갖고 한 선택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김옥숙과의 우정
—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었을까.
“노태우씨를 훌륭한 후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기울인 그분의 노력은 노태우씨가 맡았던 화려한 경력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제2정무 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민정당 대통령 후보…. 60세도 안 된 나이에 이렇듯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다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직(職)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의 의중을 짐작한 사람 몇몇이 ‘후배나 부하에게는 권력을 물려줄 수 있어도 친구나 동지에게 물려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40년 지기(知己)였기에 누구보다 자신이 인간 노태우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자신이 야심 차게 키운 노태우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신이 못다 이룬 핵심 정책들을 더욱 성장·발전시켜 ‘선진 조국 달성’이라는 자신의 국정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와 가까이 지내시는지.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과는 10년간 영어 공부를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남편들 때문에 알게 된 사이지만, 남편 내조하는 스타일이나 아이들 교육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계발에 열심인 점이 서로 통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남편이 심중에 두었던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기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와 김옥숙 여사의 우정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배우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는 요즈음 서로 힘이 되며 살고 싶어 연락했지만, ‘누구를 만날 형편이 못 된다’는 얘기만 들었다. 가슴이 아프다.”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
— 7년간 재임하시고, 청와대를 떠나실 때 전 대통령은 58세, 여사님께서는 50세셨는데, 아쉬움 같은 건 없으셨나.
“임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누구보다 기뻐했다. 어떤 알 수 없는 변수가 남편을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할까 봐 임기 내내 전전긍긍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 7년 6개월의 청와대 생활, 영부인 역할을 하시면서 어떤 때가 가장 보람이 있으셨나.
“요즈음 청와대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드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새세대육영회’를 통해 당시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아교육 환경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던 일, 그리고 수술만 받으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6만여 명의 시한부 심장병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했던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단의 도움을 받아 하루 4명의 시한부 환자가 건강과 새 생명을 꿈꾸며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유아교육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창립한 새세대육영회는 국회가 마련한 ‘5공 청문회’의 무서운 추궁까지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그 단체는 정부의 압력 때문에 단체 이름도 ‘새세대육영회’에서 ‘아이 코리아’로 바뀌긴 했어도 2022년도까지 나와 육영회 회원들이 추진하던 사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참으로 뿌듯하다.”
“올림픽 개회식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해”
—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했던 전두환 대통령인데, 정작 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2017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힌 당시 그분의 솔직한 심정은 다시 봐도 눈물이 나고 속이 상한다. ‘5공 청산’ 정국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그분의 국회 출석 증언이 불가피하다는 야당 측의 끈질긴 요구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그런 가운데 88서울올림픽 개최의 날은 점점 다가왔다. 그분은 그 개회식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분의 이런 희망은 누가 봐도 무리 없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6공 청와대에서는 그분의 올림픽 개회식 참석을 바라지 않는다는 얘기를 언론에 흘리고 있었다. 그분은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의 초청장을 거부했고, 노 대통령의 형식적인 유감 전화를 받았다. 9월 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했고, 그분은 집에서 TV를 통해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 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도 있었다.”
— 정치적 상황에 의해 백담사로 떠나실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분은 올림픽을 계기로 국정이 어두운 ‘5공 청산’의 질곡에서 벗어나 올림픽 성공의 부가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며 발전적인 미래로 전진해나가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 염원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잠시 주춤했다 다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언론이 다시 그분의 재임 중의 일들을 왜곡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올림픽에 대한 그분의 역할과 5공화국의 최소한의 땀과 공적마저도 외면했다. 왜곡된 과거에 대한 분노만으로 그분과 지난 정부를 몰아세우며 성토해댔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한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전두환 대통령은 그때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분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을 맞아 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새 정부로서 새로운 출발, 더 높은 도약을 위해 과거사를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불가피한 모양이라고 이해하며 성원하고 있었다. 다만 ‘5공 청산’에 몰두하느라 올림픽의 성공이 가져다줄 국운 번창의 힘찬 동력, 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황금 같은 타이밍을 놓칠까 봐 염려하며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의 태도가 애매했다.
“여론의 비판이 극심할 즈음에 언론보도 속에서 그이의 ‘외국 추방’ ‘은둔’ ‘낙향’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낯선 말들 속에 잠복해 있는 그 어떤 음습한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연희동 집 문을 두드렸다. 정부 측에서 한 사람이 그분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그분에게 보도 내용과 똑같은 요구를 해오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악할 내용의 요구였다. 평소 그분은 후진국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치부하고 재임 기간 동안 그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두었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외국으로 도망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례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그런데 마치 자신도 그런 매국적인 지도자인 양 해외로 내몰려고 하는 새 정부의 발상 앞에서 그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이 그분의 신념이었다.”
— 혹시 노태우 정부에선 환갑 나이에 불과한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국가원로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도 같다. 단임을 결심할 때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결심도 했어야 했는데, 국가원로로서의 활동은 유지하려다 노 대통령과 3김씨 모두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 것 같다.”
백담사에서의 첫날 밤
— 백담사로 가는 건 어느 분이 결정하셨나.
“그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이현우씨로부터 자신의 해외 망명을 청와대에서 원하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날, 노태우 대통령의 진심을 알게 됐다. 친구 전두환을 보호하고 싶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려운 결심들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 노태우가 어떤 이유에서건 친구 전두환이 서울을 떠나 사라져 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밤 허탈한 모습으로 밤새워 생각에 잠겼던 남편은 내게 서울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왕에 가는 것,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첩첩산중으로 가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백담사로 떠나기에 앞서 그분은 국민들 앞에 서서 진심을 다해 사죄한 후, 내 땅, 내 조국에 남아 받는 벌이라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는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한 후 은둔의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그분은 침묵을 지키고 계셨는데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곁에 계신 분을 생각해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도 마음의 고통으로 말하면 나보다 몇백 곱절은 더했을 그분 앞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그분이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이라고 말하며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준 후에야 서러운 울음을 그쳤으니 말이다.”
— 전업주부로 살아오시다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하셨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다.
“보통 가정의 전업주부가 그렇듯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연설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카메라 앞이나 대중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극도로 긴장해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영부인은 수습기간도 롤 모델도 없는 역할이었다.”
— 그렇다고 영부인의 역할을 사양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더군다나 임기 내내 제2부속실을 2급 비서관 한 명, 5급 행정관 한 명, 이렇게 두 명만을 두고 운영했기 때문에 행사가 확정되면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연설문 초안과 행사내용 자료들을 전달받으면 여기저기 쉬어갈 곳, 높낮이가 필요한 곳을 표시해가며 열심히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행사장에서 연설문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어느새 등에는 진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조언자 없이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길을 택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마흔두 살에 첫 해외여행
1981년 8월 대통령 전용열차로 취임 후 첫 휴가를 저도로 갔다. 전 대통령이 곧 미국으로 떠날 외동딸 효선씨와 물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5공화국 정부의 개방화 정책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만 해도 공직자 부인의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40년 전 국민소득이 겨우 1800달러(1981년 GNI)였던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남편이 장군 진급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라 형편이 조금 나아져 여름휴가가 허락됐던 거다. 이듬해 여름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별천지 같았다.”
— 한미정상회담 준비는 어떻게 했나.
“장관들과 수행원들이 12년 만에 성사된 한국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실수 없이 준비해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도 내내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나날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접견 인사 자료’부터 ‘만찬 자료’까지 모든 자료를 마치 수험생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 회담 분위기는 어땠나.
“1980년 2월 2일 오전, 레이건 대통령과 상견례를 겸한 단독회담을 가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먼저 땅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졌고, 그분은 군사 전문가답게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설명해나갔다고 하더라. 이때 레이건 대통령은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지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주한미군 철수는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분에게 말했다. 오찬장으로 향하는 그분은 고무돼 있어선지 표정이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나카소네와의 우정
오찬장으로 이순자 여사를 에스코트해주고 있는 레이건 대통령. 뒤편에 전두환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보인다. 사진=이순자 여사 |
“레이건 대통령이 경쾌한 목소리로 ‘제가 오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영부인님’이라고 하시며 ‘나도 취임(1월 20일)한 지 보름밖에 안 돼 화장실을 겨우 찾는다’고 조크하셨다. 검은 정장에 푸른빛 넥타이를 맨 노신사, 레이건 대통령이 왼팔을 내밀며 정중히 건네는 말에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의전(儀典)과 관련해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 낯선 남자의 팔짱을 낀다는 것이 생소하지는 않았나.
“앨범을 보면, 거절하는 것이 더 결례인 것 같아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쓰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레이건 대통령이 오찬 도중에 ‘영부인께서도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셨는데, 미국 방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현안이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였기에 그가 한국의 안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지금 접견실에 걸려 있는 사진처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아래 레이건 대통령 내외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섰다. 두 정상은 마치 백년지기(百年知己)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양국의 새로운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도쿄도 히노데마치에 있는 나카소네 총리의 별장 ‘히노데 산장’. 나카소네 총리는 전 대통령의 출소를 기다려 이곳에 초대해 레이건 대통령,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나무 옆에 식수하도록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세 분은 나이를 초월해 교류를 이어갔다. 퇴임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나카소네 총리는 치매 때문에 사회생활을 일찍 접은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우리 부부가 백담사에 있을 때는 따뜻한 내복과 고급 원단인 비쿠나로 지은 옷, 레코드를 보내주셨고, 남편이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올 때는 도쿄 ‘히노데(日の出) 산장’에 초대해주셨다. 그곳에서 우리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식수한 나무 옆에 나란히 기념식수를 했다. 얼마 전 그분의 아드님인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弘文) 참의원 의원이 결혼을 앞둔 아들 나카소네 야스타카(中曾根康隆) 중의원 의원과 함께 연희동에 들렀다.”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 취임한 지 1년 만인 1981년 8월에 사촌동생이 구속되는 등 이때부터 친인척 관련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주변의 작은 실수 하나라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국정에 임했다. 그분은 어렸을 적 서당에 함께 다녔던 사촌동생을 구속시켰다. 사기꾼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한국노년복지자조회 임원이라는 감투를 얻어 쓴 채 실컷 이용당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법 앞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며 법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분은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라며 자책했다. 자신이 대통령만 되지 않았다면 감방은커녕 일생 파출소 유치장 구경 한 번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사촌동생을 구속시킨 사람이 됐다면서. 그이는 일과 후 혼자 있을 때면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괴로워하실 숙부를 생각하며 몹시 참담해했다.”
— 1982년 5월 건국 이래 최대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張玲子)와 이철희(李哲熙)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들이 기업으로부터 편취한 어음 액면가만 7111억원에 달했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표방하는 전두환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다. 그 얘기는 친정 여동생을 통해 처음 들었다. 내 측근을 사칭하는 한 여자가 서울 한복판 특급호텔 한 층을 통째로 쓰면서 큰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나의 작은아버님 재혼 부인의 여동생이고, 첫 결혼에 실패하고 3공화국의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이철희라는 사람과 ‘사파리 클럽’이라는 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거다.”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전 대통령께 말씀을 드렸나.
“사실을 알렸고, 청와대는 즉각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얼마 후 궁금해하는 내게 조사 결과를 설명해주던 그분은 한동안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보, 오늘 보고한 사람이 아주 묘한 소리를 한마디 합디다. 시중에 퍼진 소문이라는데, 장영자라는 사람 뒤에 당신의 작은아버지 이규광(李圭光)씨가 있고, 또 그 뒤에는 청와대와 민정당이 있는데, 우리가 그 장씨를 통해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거요.’ 그분의 이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진 여사께서 전 대통령께 헤어지자고도 하셨다면서요.
“사기 행각을 벌인 그 여자가 작은아버지의 처제라고 하니 무력감(無力感)이 몰려왔다. 남편에게 대통령 끝나실 때까지만이라도 헤어져 있자고 했다. 정말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혼, 아니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분은 직원들에게 ‘청와대와는 단연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 소신을 갖고 원칙대로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5월 들어 드디어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구속됐고, 구속자 중에는 작은아버지도 포함돼 있었다. 장영자는 자신의 탐욕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많은 성실한 사람을 파산시켰고, 그들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화상을 남겼다.”
— 5공화국 시절 TV 뉴스 등에 여사께서 자주 등장했다.
“그분은 군 시절부터 남자들만의 모임보다 부부 동반, 가족 모임을 더 좋아했다. 그리 하는 게 여성에 대한 올바른 대접이라는 게 그분의 나름 생활철학이기도 했다. ‘주부들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겠소. 사람을 많이 만나 내가 직접 협조를 구하려고 해도 장소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어렵소. 그러니 힘들더라도 따로 사람들을 만나 협조를 부탁해보시오’라고 하니 돕지 않을 수 없었다.”
— 전 대통령의 이런 생각이 여성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분과 함께 지방 출장이든 어디든 가게 됐을 때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이 되더라. ‘혹 실수라도 저질러 대통령의 위신을 실추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강박감이 몰려와 병이 날 지경이었다. 양장 차림을 하면 살이 빠져 왜소해진 내가 더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을 주로 입었다. 한데 때마침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열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버렸다. 텔레비전 속의 내 존재는 대통령의 조용한 내조자가 아닌, 사치스럽고 화려한 대중스타로 내비쳤다. 이웅희(李雄熙) 공보수석을 만나 참석 행사 횟수를 줄이고, 부득이 참석하더라도 가급적 뉴스 화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고 부탁드렸다.”
— 여사님께서 모 여배우를 질투해 미국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살다 보면 좌절과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인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라는 대통령 부인이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는 못할망정 오해와 비웃음, 악성 추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배우 장모씨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각하가 그녀를 좋아해서 내가 그녀의 자궁을 적출했기 때문이란 루머도 퍼졌다. 내가 속으로 ‘내가 정말 능력자네…’ 이런 생각도 했다(웃음).”
“그분의 폭포수 같은 눈물 처음 봐”
버마 우산유 대통령의 안내로 육군병원을 찾아 부상자를 위로하는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랑군한글학교 학생과 학부모 초청 담소 시간을 갖고 있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급하게 흘려 쓴 글씨로 ‘각하께서 행사를 중단하고 돌아오시니 영부인께서도 행사를 마무리해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각하께서 공식 행사를 중단했다는 전갈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황급히 학부모들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경호관의 뒤를 따랐다. 경호관은 영빈관 별채로 가고 있었다. 별채의 구석방에 도착하니 그곳에 그이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 그 긴박한 상황에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상황을 지휘했나.
“그때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이 그분에게 ‘수행원들이 잇달아 도착한 뒤 태극기를 단 이계철(李啓哲) 대사의 승용차가 도착하자 테러범들은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오판하고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던 그분의 눈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말할 수 없이 애통하고 참담한 가운데에도 그분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김병훈 의전수석, 황선필 공보수석, 장세동 경호실장 등 살아남은 세 사람의 공식수행원을 불러 ‘국화계획을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오게 하여 순국자의 유해와 부상자를 긴급 후송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발생 7분 만에 내린 조치였다. 그 황망하고 긴박한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아남은 세 분 수행원에게 비상약으로 준비해온 청심환을 건네는 일뿐이었다.”
— 귀국 후 전두환 대통령은 어떠했나.
“한동안 그분은 아끼고 의지하던 인재들을 잃은 슬픔으로 밤에도 일어나 혼자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은 새벽에 홀로 비서실을 찾아가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1988년 2월 24일자로 퇴임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청와대 직원들이 전달한 치적 액자엔 ▲최초의 단임 및 평화적 정부 이양 실현 ▲정상외교로 세계 속의 한국 부각 ▲소득배증과 10대 무역대국으로의 부상 ▲한 자릿수 물가와 흑자경제의 실현 ▲올림픽 유치와 아주대회의 성공 ▲자주방위산업체제의 확립 ▲국민연금과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 ▲문화시설의 확충과 독립기념관 건립 등이 적혀 있다.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출장거리는 국내 927회(12만7140km), 국외 7회(72일, 16개국, 16만5734km)였다.
— 국민들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제라고 생각한다.
“보안사령관 시절 ‘경제학 선생님’으로 만난 경제기획원 출신 김재익(金在益) 수석에 이어 사공일, 박영철(朴英哲), 김기환(金基桓) KDI 원장을 비롯한 쟁쟁한 경제팀이 살림을 꾸린 덕분이다. 그분은 경제관료를 쓸 때도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도록 경력 관리를 해주셨다. 그분이 달성한 경제 분야 성과라면 단연 ‘한 자릿수 물가,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 외채상환,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이 아닐까 싶다. 그분의 재임 기간 우리나라는 물가는 안정되고 경기는 호황을 누렸고, 국민들은 그동안 고통 분담에 동참한 대가를 나눠가질 수 있었다.”
6·29의 이면
1988년 2월 25일 오전 10시, 노태우 신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취임식을 마치고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1987년 6월, 당시 연일 계속되는 격렬한 대규모 집회를 통해 국민 대다수가 직선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남편은 내각제 개헌을 선호했던 자신의 고집을 꺾고, ‘직선제 개헌의 완전 수용’과 ‘가능한 민주화 조치의 단행’이라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 6·29선언도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분이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은 노 후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민정당 총재 자격으로 내각제를 홍보하고 있던 노 후보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분을 만날 때까지도 직선제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지 그분의 돌연한 제안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다. 이틀의 시간을 두고 직선제 수용의 불가피성과 직선제를 받아들인 후의 선거에서도 노태우 후보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갔다고 한다. 마침내 6월 19일 그분은 노 대표의 결심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
— 결과적으로 모든 공(功)이 노태우 대표에게 돌아갔는데….
“그분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비롯해 야당과 국민이 요구하는 모든 민주화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감한 구상을 책임지고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과실’은 노 대표에게 양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분 자신이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심판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자신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노 후보가 국민과 야당, 언론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공약을 발표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물아홉(1959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그분답게 이번에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정당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해도 될 영광과 찬사를 모두 친구 노태우에게 주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생각했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고.”
—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여사님께서 전 대통령을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인기 없는 정책을 소신 있게 채택해 끝내는 국민소득을 두 배로 올려놓은 남편, 이 나라 민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기꺼이 꺾은 남편이 퇴임 후 30년 동안 박해만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너무 홀대한다 싶어 평소 소신을 말했던 것뿐이다. 윤석열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냈다고 이야기하셨다가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기억이 났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을 닮아 헛소리를 하고 있다면서 몰아붙이니, 내가 어떤 근거로 남편이 민주화의 아버지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자서전을 보면, 국회 증언을 끝낸 1990년 1월 3일 무렵 박근(朴槿) 전 유엔대사가 전 대통령을 찾아와 대화한 내용이 나오는데, 김영삼씨의 말이 충격적이다.
“박근 대사가 교회에서 김영삼씨를 만났는데, 6·29 같은 조치를 노태우 대표가 아닌, 자신과 손잡고 했더라면 보호를 받았을 텐데, 노 대표에게 주어 이렇게 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박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씨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백담사에서 겪은 고초나 지난 31일(1989년 12월 31일) 증언대에 서서 당한 수모 같은 것은 면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당시 내 소신은 나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내가 만든 당이나 함께 일한 동지들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국가 미래만을 위해 소신을 갖고 한 선택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김옥숙과의 우정
—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었을까.
“노태우씨를 훌륭한 후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기울인 그분의 노력은 노태우씨가 맡았던 화려한 경력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제2정무 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민정당 대통령 후보…. 60세도 안 된 나이에 이렇듯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다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직(職)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의 의중을 짐작한 사람 몇몇이 ‘후배나 부하에게는 권력을 물려줄 수 있어도 친구나 동지에게 물려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40년 지기(知己)였기에 누구보다 자신이 인간 노태우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자신이 야심 차게 키운 노태우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신이 못다 이룬 핵심 정책들을 더욱 성장·발전시켜 ‘선진 조국 달성’이라는 자신의 국정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와 가까이 지내시는지.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과는 10년간 영어 공부를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남편들 때문에 알게 된 사이지만, 남편 내조하는 스타일이나 아이들 교육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계발에 열심인 점이 서로 통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남편이 심중에 두었던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기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와 김옥숙 여사의 우정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배우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는 요즈음 서로 힘이 되며 살고 싶어 연락했지만, ‘누구를 만날 형편이 못 된다’는 얘기만 들었다. 가슴이 아프다.”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
심장병 어린이 1만 명 새 생명 탄생 기념식에 참석한 이순자 여사. 이순자 여사는 재임 중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 두 단체를 탄생시키고 성장시켰다. 사진=이순자 여사 |
“임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누구보다 기뻐했다. 어떤 알 수 없는 변수가 남편을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할까 봐 임기 내내 전전긍긍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 7년 6개월의 청와대 생활, 영부인 역할을 하시면서 어떤 때가 가장 보람이 있으셨나.
“요즈음 청와대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드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새세대육영회’를 통해 당시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아교육 환경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던 일, 그리고 수술만 받으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6만여 명의 시한부 심장병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했던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단의 도움을 받아 하루 4명의 시한부 환자가 건강과 새 생명을 꿈꾸며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유아교육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창립한 새세대육영회는 국회가 마련한 ‘5공 청문회’의 무서운 추궁까지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그 단체는 정부의 압력 때문에 단체 이름도 ‘새세대육영회’에서 ‘아이 코리아’로 바뀌긴 했어도 2022년도까지 나와 육영회 회원들이 추진하던 사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참으로 뿌듯하다.”
“올림픽 개회식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해”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온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전 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축하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2017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힌 당시 그분의 솔직한 심정은 다시 봐도 눈물이 나고 속이 상한다. ‘5공 청산’ 정국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그분의 국회 출석 증언이 불가피하다는 야당 측의 끈질긴 요구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그런 가운데 88서울올림픽 개최의 날은 점점 다가왔다. 그분은 그 개회식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분의 이런 희망은 누가 봐도 무리 없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6공 청와대에서는 그분의 올림픽 개회식 참석을 바라지 않는다는 얘기를 언론에 흘리고 있었다. 그분은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의 초청장을 거부했고, 노 대통령의 형식적인 유감 전화를 받았다. 9월 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했고, 그분은 집에서 TV를 통해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 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도 있었다.”
— 정치적 상황에 의해 백담사로 떠나실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분은 올림픽을 계기로 국정이 어두운 ‘5공 청산’의 질곡에서 벗어나 올림픽 성공의 부가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며 발전적인 미래로 전진해나가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 염원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잠시 주춤했다 다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언론이 다시 그분의 재임 중의 일들을 왜곡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올림픽에 대한 그분의 역할과 5공화국의 최소한의 땀과 공적마저도 외면했다. 왜곡된 과거에 대한 분노만으로 그분과 지난 정부를 몰아세우며 성토해댔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한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전두환 대통령은 그때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분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을 맞아 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새 정부로서 새로운 출발, 더 높은 도약을 위해 과거사를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불가피한 모양이라고 이해하며 성원하고 있었다. 다만 ‘5공 청산’에 몰두하느라 올림픽의 성공이 가져다줄 국운 번창의 힘찬 동력, 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황금 같은 타이밍을 놓칠까 봐 염려하며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의 태도가 애매했다.
“여론의 비판이 극심할 즈음에 언론보도 속에서 그이의 ‘외국 추방’ ‘은둔’ ‘낙향’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낯선 말들 속에 잠복해 있는 그 어떤 음습한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연희동 집 문을 두드렸다. 정부 측에서 한 사람이 그분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그분에게 보도 내용과 똑같은 요구를 해오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악할 내용의 요구였다. 평소 그분은 후진국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치부하고 재임 기간 동안 그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두었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외국으로 도망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례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그런데 마치 자신도 그런 매국적인 지도자인 양 해외로 내몰려고 하는 새 정부의 발상 앞에서 그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이 그분의 신념이었다.”
— 혹시 노태우 정부에선 환갑 나이에 불과한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국가원로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도 같다. 단임을 결심할 때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결심도 했어야 했는데, 국가원로로서의 활동은 유지하려다 노 대통령과 3김씨 모두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 것 같다.”
백담사에서의 첫날 밤
1988년 11월 23일 오전 10시20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응접실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행장도 꾸리지 못한 황망한 출가에 이순자 여사가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그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이현우씨로부터 자신의 해외 망명을 청와대에서 원하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날, 노태우 대통령의 진심을 알게 됐다. 친구 전두환을 보호하고 싶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려운 결심들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 노태우가 어떤 이유에서건 친구 전두환이 서울을 떠나 사라져 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밤 허탈한 모습으로 밤새워 생각에 잠겼던 남편은 내게 서울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왕에 가는 것,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첩첩산중으로 가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백담사로 떠나기에 앞서 그분은 국민들 앞에 서서 진심을 다해 사죄한 후, 내 땅, 내 조국에 남아 받는 벌이라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는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한 후 은둔의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그분은 침묵을 지키고 계셨는데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곁에 계신 분을 생각해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도 마음의 고통으로 말하면 나보다 몇백 곱절은 더했을 그분 앞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그분이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이라고 말하며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준 후에야 서러운 울음을 그쳤으니 말이다.”
자나 깨나 전 대통령 부부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서울에 두고 온 고3 아들 걱정이었다. 사진=이순자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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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담사에 처음 갔을 때 가장 걱정되던 건 무엇이었나.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다시 수십 리의 외길을 가야 했는데 길이 얼마나 험하던지 차에서 내려 밀고 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외길이 끝나는 계곡 사이에, 통나무로 얽어 만든 외나무다리가 보였고, 스님들과 앞질러 달려온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외나무다리 뒤로 낡고 초라한 작은 절 하나가 보였다. 이것이 백담사와 우리 내외의 첫 만남이었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황이 없어 말 한마디 변변히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막내아들 재만을 생각하자 목이 메어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청와대에 들어가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에게 엄마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해 주었다. 청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동안 못다 한 정성을 쏟아주리라 결심했지만,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낯선 곳으로 떠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외가댁도, 아니 온 친척들이 모두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어 아이를 맡길 만한 곳도 없었다. 황망히 서울을 떠나오면서 누나가 있는 사돈댁에 가 있도록 일러두었지만, 그 애가 받았을 엄청난 충격이 생각나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밤을 시작으로 우리 내외는 그곳에서 769일(2년 1개월 8일)을 보내야 했다.”
“음식 챙겨 들고 찾아주신 국민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지만 손주들이 찾아오면 시름을 잊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주들을 자전거에 태워주며 마냥 즐거워하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순자 여사 |
“끝까지 곁을 지켜준 측근들이다. 그리고 백담사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처지가 안타까워 맛있는 음식 챙겨 들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주신 국민들이다. 그리고 부모들 따라 매주 주말이면 찾아와 온갖 재롱을 피워주던 손주들과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동네 아주머님들이었다. 비 때문에 백담사까지 올라오지 못한 방문객들이 그분을 보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주차장까지 내려가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에 그분은 버스 위까지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동네 아줌마들이랑 김장거리 다듬기도 하고, 여름이면 손녀를 데리고 텃밭에 나가 감자를 캤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저는 오늘 이 나라가 과연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로 시작되는 성명문 낭독은 8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관을 따져 묻고 ‘군사 반란 세력’과 야합한 김 대통령의 행적을 추궁하는 내용의 성명은 당시의 상황에서 국민들에게는 ‘사이다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청와대가 예상치 못했던 그분의 대국민성명으로 몹시 심기 상해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듯 그분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작전’이 자행됐다. 성명이 있은 바로 다음 날인 1995년 12월 3일, 만물이 어둠에 싸여 있던 일요일 새벽 6시34분경, 그분은 여장을 풀었던 합천 장조카 집에서 급파된 검찰 수사관에 의해 강제 구인당했다. 그분을 태운 호송 차량은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후 안양교도소에 도착했고, 구속 직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11시간에 걸친 신문을 받았다.”
— 당시에 안양교도소에 수감되면서 28일간 단식을 하셨다.
“맞다. 장기간의 단식으로 지방과 근육이 많이 빠지게 됐는데, 사면 복권된 후 적절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게 됐지만, 해마가 약간 뿌옇게 나올 정도의 뇌손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2015년 11월 25일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말없이 조문하고 돌아왔다. 정치자금을 뇌물죄로 몰아 추징금 환수라는 명분으로 전 가족의 재산을 초헌법적 수단으로 몰수해간 김영삼씨의 이해할 수 없는 자기모순과 악의를 그분은 ‘가는 마당에’란 말로 감싸 안았던 것이다.”
“영감 그때 잘못하셔서 고생이 많다”
전 대통령의 큰며느리와 장손 우석군이 주말을 맞아 백담사를 찾았다. |
“대부분의 사람은 퇴임 후 10년간 집요하게 그분을 강타한 수난들이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됨으로써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추징금 환수라는 올가미가 그분에게 씌어 있었고, 정치권력은 대를 이어가며 필요에 따라 그 올가미를 당김으로써 그분의 숨통을 조였다.”
백담사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가끔 찾아오는 손녀를 업어주면서 시름을 달랬다. 사진=이순자 여사 |
“맞다. 대통령 재임 중 거둔 정치자금은 모두 ‘뇌물’이고 뇌물로 받은 돈은 그것이 이미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인지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모두 개인이 물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 판결의 내용이었다. 추징금은 정치자금법 이전에 당 총재가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쓰는 공적자금이었다. 그분은 그 돈을 효자동 상업은행에 예치시켜놓고 공공개념으로 운영했다. 남편은 정치자금 중 많은 부분을 재임 중 고지식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추징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게다가 단식 와중에 검찰의 수사를 받던 그분은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검사가 내미는 은행계좌에 찍힌 돈을 모조리 받은 것으로 인정했고, 그분이 기업 대신 십자가를 지는 바람에 천문학적인 2205억원이라는 추징을 당하게 된 것이다.”
— 그걸 소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이 그때 ‘내란수괴(內亂首魁)면 무조건 사형인데, 그깟 돈을 가지고 기업인들과 재판정에서 주었다, 안 받았다 치사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걸 따져 검찰이 증명하도록 했어야 했고, 그 액수가 확정되었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고생을 안 하는데… 하여튼, 살아계실 때는 말을 못 했지만, 영감 그때 잘못하셔서 고생이 많다(웃음).”
‘전 재산 29만원’의 진실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장세동 전 경호실장 등 측근들과 산행을 했다. 전 전 대통령이 5·18 관련 재판을 받을 때 함께한 인물들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2003년 검찰은 남편에게 ‘재산명시 명령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후 법원에 출두해서 선서하라고 통보해왔다. 그분은 변호인에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재산을 빠짐없이 기록해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변호인들은 남편 명의로 돼 있는 연희동 별채는 물론 유체부동산, 서화류, 사용하던 골프채까지 망라해 소유물을 남김없이 ‘재산명시서’에 기록했다. 그런데 마지막 완성본을 읽어본 남편이 자신이 직접 법원까지 나가 선서해야 하는 사안이니,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혹시 검찰에서 가져간 통장에 얼마간의 이자가 발생해 있을지 모르니 알아보라고 했다. 변호인들이 알아본 결과, 검찰이 추징해간 휴면계좌에서 총 29만원의 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액이지만 정확을 기하는 의미에서 기재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그 사실을 마치 남편이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왜곡해서 보도하더라. 기가 막힌 왜곡 보도다. 그 이후 그 ‘29만원’은 ‘29만원밖에 없다면서 골프를 치느냐’는 식으로 그분을 조롱하는 말이 됐다.”
— 2003년 10월, 법원의 명령에 따라 제출한 재산목록에 기재된 자산은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심정이 어떠했나.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각까지 진행된 경매는, 역시 경매에 부쳐진 연희동 집에서 진행됐다. 피아노, 응접세트 3점, 카펫 3점, 식탁세트, 찬장, 에어컨, 냉장고 3개, 텔레비전 3대, DVD베스트, 골프세트 2점, 컴퓨터, 프린터, 책상, 회전의자 등 우리 가족의 손때가 묻은 가재도구들이 경매되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 장면이다. 우리 가족이 키우던 진돗개 ‘설이’와 ‘송이’도 검찰에 압류돼 경매에 부쳐졌는데, 영문을 모른 채 웅크리고 있던 설이와 송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어린 손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하다하다 키우던 개마저 경매에 부치는 것이 이 나라 법이고 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천만다행으로 설이와 송이는 아이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측은하게 여긴 이웃 주민 한 분이 경매에 참여해 사주신 덕분에 아이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
“둘째 아들 이혼한 전처의 집까지 압수수색”
이순자 여사의 연희동 서재. 이곳에서 2만여 쪽에 달하는 자서전 초고를 정리해 2017년 자서전을 펴냈다. 사진=이순자 여사 |
“대한민국 국회는 건국 이래 모두 네 번 소급입법인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 네 번의 소급입법 중 두 번이 전두환 대통령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첫째는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제정한 ‘5·18특별법’이고, 2013년 박근혜(朴槿惠) 정부 시절 제정된 위헌 소지의 ‘전두환법’이다. 이 법이 제정되기가 무섭게 검찰은 연희동 집에 대한 가택수색은 물론, 막내아들 장인의 회사와 사저, 심지어 둘째 아들의 이혼한 전처의 집까지 압수수색을 했고, 이 과정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약혼·결혼 패물들까지 압수해 갔다. 물론 그분의 사돈의 팔촌들의 재산이 1980년도 이후에 그분의 정치자금에서 유래된 재산이라는 것을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 난제가 있었지만, 우선 검찰은 닥치는 대로 그분과 그분 주변을 압박했던 것이다.”
— 2013년 장남 전재국씨가 추징금 완납을 약속한 적이 있다.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징금에 대한 의무는 면책되는 것인가.
“2013년 장남 전재국이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던 재산은 이미 추징이 완료되었다고 알고 있다. 다만 경매에 부쳐진 재산의 가격이 당시 검찰이 발표했던 액수만큼 높게 나오지 않아 완납되지 못한 것이다. 미납된 추징금은 자손들에게 상속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盧載憲)씨는 2019년 8월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사과했는데, 왜 전두환 대통령 측은 사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조문객들 앞에서 나는 가족을 대표해 ‘남편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5·18로 인해 희생되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저희는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게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라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남편을 잃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로워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알게 돼 위로해드리고 싶어 큰 마음 먹고 사죄의 말씀을 올렸던 것이다.”
“병들고 늙어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든 나이에…”
1990년 12월 30일,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2년여 동안 신세를 진 백담사 대웅전에서 송별기도를 드리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광주지방법원이 남편에 대한 구인장을 집행하기로 한 2021년 3월 11일 아침의 일이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돌발행동에 대비해 여벌의 옷을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몹시도 마음이 언짢았다. 물어보고 따지고 벌주려면 몸이 좀 건강하고 기억력도 온전할 때 했으면 좋았으련만, 병들고 늙어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든 나이에 장장 10시간이나 걸리는 곳으로 불러내 구인까지 하려 하다니…. 구인장(拘引狀)이 발부돼 광주지방법원으로 가고 있던 남편은 몸에서 호랑이 기운이 느껴지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었다. 병들고 노쇠해져 아내인 내가 옆에서 보살펴드리지 않으면 광주까지 가는 일도, 재판정에 참석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일도 어려운 노인일 뿐이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생전에 5·18 문제와 관련해 남기신 말씀은 없나.
“남편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 좀 더 노력하지 못했던 점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 정치권의 요구로 2년여에 걸친 백담사 생활을 했을 당시, 몸도 마음도 몹시 고단한 가운데에도 광주사태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희생된 분들의 영가(靈駕)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100일 기도를 연달아 강행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깊은 회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도 5·18특별법 제정으로 구속돼 안양교도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단식 후유증으로 몸이 몹시 불편한 가운데에도 옥중에서 매일 한 시간씩 고성(高聲)으로 염불하며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이는 알츠하이머라는 병 때문에 방금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정신이 온전했을 때는 ‘과거는 물에 흘려보내고 국민이 다시 화합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전두환, “있는 그대로 평가를 받을 것”
—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를 보면서, 공직자는 역사 앞에서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의 저서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중앙공론)에서 그같이 말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7년 반 동안 국정을 책임졌던 그분 역시 역사 앞에서 무한(無限)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적인 일뿐 아니라 사적인 일까지 담당 비서관을 배석시켜 기록을 하는 남편을 보며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편은 소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적(政敵)들에 의해 악용당하는 걸 두려워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길 것이고, 있는 그대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월간 조선
NewsRoom Exclusive
글=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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