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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임금 일거수일투족 적은 ‘조선사 기록자

by 까망잉크 2023. 1. 7.

임금 일거수일투족 적은 ‘조선사 기록자’… 왕실 ‘비하인드’까지 남겨[지식카페]

입력2023.01.06. 오전 8:55 수정2023.01.06. 오전 8:58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14) 예문관 8한림

예문관 소속 8명의 사관… 회의 등 공식행사부터 사냥·온천까지 2인1조로 따라다니며 기록

인성평가·비밀스러운 일 등은 따로 ‘사초’로 보관…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되기도

◇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작성한 시정기

홍문관과 함께 조선의 학문을 책임지고 있던 예문관에는 특별한 임무를 맡은 여덟 명의 젊고 청렴한 관원들이 있었다. 이른바 8한림으로 불리는 사관들이 바로 그들이다. 8한림은 예문관 관원 중에 정7품 봉교 2명을 비롯한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을 통칭한 말이다. 그들은 모두 7품 이하의 낮은 직급이었지만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며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관들이었다. 사관(史官)이란 사초를 작성하고 시정기를 찬술하는 임무를 맡은 관원을 의미하는데, 넓은 의미로는 춘추관에 소속된 수찬관(정3품 당상관) 이하의 모든 관원을 통칭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론 예문관에 소속돼 있으면서 춘추관의 기사관 직을 겸한 8한림만을 지칭한다. 이들 8한림을 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춘추관의 나머지 관원들은 모두 다른 임무를 겸하고 있는 데 반해 이들은 오로지 역사 기록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록 예문관의 낮은 관원에 불과했지만, 봉교 이하의 8한림은 봉교의 지휘 아래 독자적인 업무를 진행했다. 이들 여덟 명은 2인 1조가 돼 2교대로 근무하면서 국사가 논의되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 참여하여 역사를 기록했다. 조회, 조참, 상참과 같은 회의는 물론 왕과 신하가 만나는 윤대나 왕의 수업 시간인 경연, 중신회의, 백관회의 등등 국사와 관련된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그들이 있었다.

또한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도 항상 검열 한 사람이 파견돼 정사에 대한 기록을 하였고, 의정부, 중추원, 육조 등의 대신이나 삼사의 관원이 국왕을 특별히 면대하는 장소나 국왕의 각종 행사에도 따라다니며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국왕이 사냥을 가거나 온천을 갈 때도 항상 곁에 붙어 있으면서 상황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때때로 사관이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특히 개인적인 취미를 즐기고 색을 탐하는 왕에겐 항상 따라붙는 사관의 존재가 매우 성가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 같은 경우엔 사관이 사냥터까지 따라붙는 것에 대해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폭정을 행했던 연산군 역시 사관의 존재를 매우 귀찮아했고, 그것은 결국 무오사화라는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의 그런 태도와 상관없이 사관들은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 자료는 시정기(時政記)라는 이름으로 매달 책으로 묶어 공적 사초로 사용했다. 그리고 매년 마지막 달에 시정기가 몇 권이나 편집되었는지 왕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책의 수만 보고할 뿐 시정기의 내용은 왕도 볼 수 없었다. 왕이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사관들이 거짓 없이 사초를 기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시정기는 편찬되면 춘추관에 봉인되어 보관했다가 왕이 죽은 후에 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로 사용됐다. 또한 시정기는 실록이 편찬되면 세초라 하여 물에 빨아서 내용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종이만 재생하여 사용했다. 시정기를 구성할 땐, 첫째 줄에는 연월일, 간지, 날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변괴를 기록하고 둘째 줄에는 왕이 머무른 곳, 경연 참석 여부, 왕에게 보고된 일이나 왕의 명령 사항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왕명에 관한 기록을 하는데도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왕명이 내려진 경위를 쓰는 데 있어서 우선, 신하가 입시하여 설명한 내용을 간략하게 요점만 기록하되, 사건의 진행 과정과 시시비비에 관한 것은 기승전결을 세세하게 적도록 했다. 또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보고한 것은 무슨 내용이든 모두 기록하였으며, 반복된 내용은 첨가된 부분만 적도록 했다. 의식과 예법에 관련된 사항은 생략하는 법 없이 모두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과거 급제자를 기록할 땐 급제자 모두를 적은 것이 아니라 누구 외 몇 명이라고만 쓰고, 관리 임용과 관련해서는 정3품 이상 고관만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지방관의 임명과 특별 임용 또는 임용 과정에서 물의가 있는 경우는 아무리 낮은 관리라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든 시정기는 한 부를 필사하여 부본(副本)을 만든 후에 충주사고에 따로 보관했다. 화재나 도난, 망실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피바람의 원인이 된 가장 사초

사관은 공적 사초인 시정기 외에도 개인적으로 쓰는 사초가 있었는데, 이를 가장(家藏) 사초 혹은 사장(私藏) 사초라고 불렀다. 집에 감춰두거나 개인적으로 숨겨둔 사초라는 뜻이다. 사관은 비밀리에 사장 사초를 만들어 뒀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곤 했다.

가장 사초는 주로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나 관료 개개인의 인물 됨됨이 등을 기록했다. 또한 사건에 따라서는 사관의 개인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는데, 심지어 왕의 행동이나 인성에 대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장 사초는 때때로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에 훈척 세력이 김일손이 쓴 가장 사초를 트집 잡아 사림들을 대거 죽인 정치 사건으로, 1498년 무오년 7월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유자광이 김일손의 사초에 문제가 있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김일손이 쓴 사초에 따르면 세조가 자신의 죽은 아들인 의경세자의 후궁 권 귀인을 따로 불렀는데, 권 귀인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는 세조가 아들의 후궁을 탐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김일손의 사초엔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실려 있었는데, 이것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글로 여겨졌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위한 일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을 빗댄 것이었기 때문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에둘러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 일로 연산군이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는 바람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무오사화는 이처럼 사초로부터 시작된 사건이라 하여 다른 사화와 구분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게 된 것이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사관들에게 가장 사초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시정기를 감시하고, 그 속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모두 삭제하게 했다. 또한 홍문관이나 사간원 등 언론 기관을 폐지하여 정사에 대한 비판 자체를 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관의 숫자도 극소수로 줄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당시 사관은 그저 연산군이 원하는 내용만 기록해야 했다. 이런 연산군의 전횡에 대해 당시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즉위 이후의 일기 사초(日記史草)에 만약 직언 당론(直言黨論)이 있으면 모두 도려내고 삭제하게 했으며, 가장 사초도 또한 거둬들이게 하였고, 또 인군의 과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겸대춘추(兼帶春秋·춘추관의 직을 겸임하는 것)의 호칭을 모두 혁파하고 다른 관리를 교사관(校史官)이라 지칭하고 즉위 뒤의 ‘실록(實錄)’을 찬집(撰集)하게 하였다.”(중종 1년 9월 2일 연산의 죄상에 대한 사신의 논찬)

하지만 연산군이 폐출되자, 숨기고 있던 가장 사초들이 쏟아져 나와 연산군의 학정과 전횡이 ‘연산군일기’에 낱낱이 기록되게 되었다. 이렇듯 가장 사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에도 여러 사화가 일어나면서 가장 사초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장 사초는 원래 이름을 기입하지 않고 제출했는데, 무오사화 이후에도 몇 차례 사화가 일어나자 사초를 제출할 때는 작성자의 이름을 기입하도록 변경됐다. 그 바람에 사장 사초 특유의 날카로운 사론(史論·역사에 관한 주장이나 이론)이 크게 퇴색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선조 이후 붕당 정치시대가 도래하면서 사관들도 당파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당론에 따른 사초 작성으로 귀결되었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정 실록을 편찬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정 실록을 편찬하더라도 처음 편찬한 실록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고 따로 덧붙인 책자에 수정 내용만 담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치열한 당파 싸움 중에 편찬된 실록일지라도 이후에 다시 수정 실록이 더해짐으로써 양쪽 진영의 시각을 함께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값진 결과의 배경엔 역사 기록에 피와 땀과 청춘을 바친 젊고 패기만만한 예문관의 8한림이 있었다.

작가

■ 용어설명 - 예문관(藝文館)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1456년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폐지된 뒤 집현전에서 수행하던 인재 양성과 학술 기능을 예문관에서 일부 대행하기도 했다. 1462년 신설된 ‘겸예문관직(兼藝文館職)’ 역시 젊고 유능한 문신이 예문관을 겸하게 해 학문에 힘쓰도록 한 제도였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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