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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 Trace 25.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21

by 까망잉크 2023. 2. 2.

# Trace 25.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21

조선최장수대왕이지만 치매, 영조(제 21대왕 1694~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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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은 소화기계가 좋지 않았던 원조 약골, 예민쟁이이지만 52년이라는 최장 재위기간을 갖는 조선 중흥의 상징입니다.

그는 조선 왕 중 유일하게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민가에서 자라며, 서자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생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평생 약을 달고 산 허약체질임에도, 소식하며 꼼꼼한 건강관리를 실천한 장수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체질을 이해하고, 스스로 약점과 단점을 꾸준히 보완하였던 것입니다. 왕처럼 호의호식하지않고 편하게 살지 않았던 검소한 생활습관 또한 83세까지 장수한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1) 소화기냉증에 뜸을 떴습니다.

영조는 평소 소화기냉증이 앓았는데, 회충에 의해 위장의 기운이 위로 치밀어오르는 ‘상충(上衝)’과 구역감이 심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록에는 위장에 따뜻한 기운을 보태기 위해서 배꼽뜸질(연제법, 煉臍法)을 즐겨 행하였다고 전합니다.

배꼽을 손발을 뻗은 인체의 중심으로 보는 지혜는 르네상스시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에도 함께 보여지고 있습니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따라서, <동의보감>에는 “인체의 중심인 배꼽에 더운 김을 쏘아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어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는 치료효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검소하였으며, 건강한 생활습관을 실천하였습니다.

검소식단으로 절제하였으며, 허약체질을 극복하기위해 영조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관리하였습니다.

평소 위장의 냉증을 없애기 위해, 따스한 약재인 인삼과 계지, 건강 등이 처방된 <이중탕>과, 여기에 녹용과 우슬, 부자 등을 넣어 복용하였습니다. 특히, 나라를 건국한 공로와 같다며 <건공탕>으로 불리며, 한 해 인삼 20근을 소비할 정도로 영조는 건강을 챙겼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오랫동안 괴롭힌 어깨통증에도 침이나 습부, 탕약, 고약 등 다른 보조요법을 강조하였습니다. 솔잎을 쪄서 따뜻하게 감싼다든지, 누에고치를 볶아 붙이거나, 천초를 술에 달여 수건으로 감싸기도 하고, 아침기상 후 팔운동으로 치료효험을 전하기도 합니다.     

3) 평생 인삼을 입에 달고살고, 생선회나 기름진 음식과 술을 멀리하였습니다.

영조는 고질적인 배앓이에 따스한 성질의 인삼의 효과를 본 뒤, 평생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생선회는 한의학적으로 차가운 성미(性味)로 소화기에 좋지 않아 멀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술을 금하는 ‘금주령’이나 ‘감선(減膳 음식의 가짓수를 줄인다)’, ‘철선(撤膳 국상이나 국가재양에 육선(肉膳)을 먹지 않는다)’을 지키고, 무엇보다 검소하였습니다.      

4) 끼니를 거르지 않고, 체질에 맞는 음식을 즐겨찾았습니다.

영조는 끼니를 거르지 않고, 제때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송이버섯이나 생전복, 새끼 꿩고기, 고추장, 밤 그리고 사슴꼬리 등 주로 따스한 식자재와 최고의 보양식을 반찬으로 찾았다고 합니다. 차가운 체질을 데워주는 건강한 음식에 그 스스로 건강의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보리밥을 즐겨하고 반찬수를 줄이는 등 검약한 식생활을 강조했다고도 합니다.     

5) ‘다음(茶飮)’을 치료보조로 음용하셨습니다.

영조는 한약을 즐겨찾고, 식단을 삼가며, 차를 항상 음용했습니다. 워낙 예민하고 허약한 체질인데다, 다리 힘도 모자라 ‘송절차’를 자주 마셨다고 전하고 있는데요. 송절은 솔뿌리로,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어혈을 없애는 약재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황토에서 자란 어린 소나무의 동쪽으로 난 뿌리를 주재료로 오가피, 우슬을 넣어 만든 것이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영조 16년부터는 귀울림과 41년에는 난청까지 시달려 신하들과의 소통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숨을 거두기 15년전 동안은 여기에 치매와 건망증까지 겹쳐 주변과 함께 심히 고생했습니다.

<실록>에는 영조 37년부터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장면과 늙어서 정신이 흐릿한 ‘혼모(昏耗)’, ‘망각(忘却)’말이 자주 나와있습니다. 

영조 51년에는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써온 <존혁각일기>에서 그의 치매증상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조의 담후(치매)가 덜했다 더했다 오락가락하니, 하교는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로 한 하의 반포는 절대 금한다.”

“헛소리를 하시는 중에 내리신 하교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의들은 이를 과도한 국정운영 스트레스로 보고, 기력을 보강하기 위해 <팔미지황원>을 처방했는데, 여기의 부자와 계피는 심장의 기운을 강하게 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양기를 강하게 하는 대표적 한약재입니다.

결국, 노환으로 치매와 폐렴으로 투병하다 83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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