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의녀 중 유일 ‘임금 주치의’… 대신들 반발에도 절대 신임받아
게재 일자 : 2022년 09월 30일(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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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12) 의녀들의 직장 생활Ⅳ
중종, 마지막까지 자신의 병 치료 전담하도록 해… 녹봉 주는 특별 관직 내리고 대장금의 말 존중
성종 때 장덕· 귀금, 충치 제거술에 남다른 재주 발휘… 분이는 毒 제거 의술 펼쳐 이름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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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 의녀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는 경우다. 그것도 의녀의 간통 사건이나 양반들이 의녀를 첩으로 들였다가 생긴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매우 드물지만 의술로 이름을 떨쳐 실록에 이름이 오르내린 의녀들도 있다. 비록 숫자는 몇 명 되지 않고 기록도 많지 않지만 그들에 관해 가급적 소상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조선의 의녀 중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인물은 중종대의 대장금(大長今)이다. 대장금은 의녀로서는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중종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을 맡겼을 정도로 신뢰받던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대장금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10년(1515년) 3월 8일이다. 이때 사헌부에선 의원 하종해를 의금부에 가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 원자(훗날의 인종)를 생산하고 3월 2일 사망한 것에 따른 문책이었다. 그런데 사헌부의 요청에 대해 중종은 하종해는 약을 마음대로 지어 올린 것이 아니라 의녀가 말하는 증상에 따라 조제한 것이므로 하종해를 의금부에서 심문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때 중종이 말한 의녀 속에는 대장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대장금이 왕비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종이 3월 22일 말하길, 대장금은 원자를 생산하는 데 큰 공을 세웠기에 반드시 상을 내려야 했지만, 갑자기 대고(大故·왕이나 왕비가 죽는 것)가 있어 상을 내리지 못했다면서 대장금에게 상을 내리지 못할망정 형장을 가할 순 없다고 했다.
이튿날 대간이 이렇게 아뢰었다.
“의녀인 장금의 죄는 하종해보다 훨씬 심합니다. 해산 후 옷을 갈아입을 때 제의하여 말렸더라면 어찌 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형조에서 법조문대로 정률에 따라 적용하지 않고 장형을 속죄시키기까지 했으니 심히 온당치 않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끝까지 장금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대장금이 다시 실록에 등장한 것은 7년 후인 1522년 8월 15일이다. 이날 중종은 대비가 중풍 증세에 감기를 앓고 있다며 의녀에게 치료하게 했으나 미진하여 의원 하종해와 김순몽이 치료에 가세하도록 했다. 그리고 9월 5일 자순대비의 병세가 호전되자, 왕은 대비를 치료한 의원 하종해와 김순몽, 의녀 신비와 장금에게 상을 내렸다. 이때 신비와 장금이 받은 상은 각각 쌀과 콩 10석씩이었다.
대장금은 이때의 공으로 중종의 병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1524년 2월 15일 대장금에게 체아직(遞兒職·녹봉을 주기 위해 특별히 만든 관직)을 내리고 자신의 간병을 전담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대장금은 명실공히 중종의 어의녀(御醫女)이자 주치의가 되었다. 하지만 중종이 한갓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사실에 대해 대신들은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들은 중종의 몸이 좋지 않을 때마다 그것을 마치 대장금의 의술이 부족한 탓인 양 말하곤 했다.
중종 27년(1532년) 10월 21일 내의원 제조 장순손과 김안로가 이런 말을 아뢰었다.
“옥체가 편안치 못한 것이 풍 증세 때문이라고 해도 상시에 금기해야 할 일은 모두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의녀에게 진맥하게 하는 것 또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의녀의 의술이 의원만 못하니, 의원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은 자신의 몸을 대장금이 보살피게 했는데, 이때 쉽게 병이 낫지 않자 내의원 제조들이 그녀를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한 말이었다. 중종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의원 하종해와 홍침을 대전으로 불러 진맥하게 했다.
중종의 병증은 풍이 원인이 되어 겨드랑이 아래쪽에 종기가 돋아있는 상태였다. 그 종기로 인해 중종은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이 일로 대신들은 왕의 치료를 의녀와 의원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며 재상들이 직접 대전으로 가서 병증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중종은 재상들이 출입하면 사관이 함께 와야 하고, 그리되면 오히려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중종의 종기는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 낫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신들이 의아해하자 중종은 1533년 1월 9일 자신의 병에 대해 해명했다. “내 종기 증세는 당초 침으로 터뜨렸을 때, 침 구멍이 넓지 않아서 나쁜 피가 다 빠지지 않고 여러 곳에서 고름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멍울이 생긴 곳은 아직 곪지 않았으므로 요사이 태일고, 호박고, 구고고 등의 고약을 계속 붙이자 멍울 섰던 곳에서 고름이 계속 나오는 것일 뿐, 다른 곳이 새롭게 곪은 것은 아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종기가 났던 곳은 이미 죽은 살이 되었으니 다시 응어리가 박힐 까닭이 없다면 대장금으로 하여금 진찰하여 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중종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중종의 종기는 나았다. 이때 병 치료에 공을 세운 사람은 의원 하종해와 의녀 대장금, 계금 등이었다. 중종은 대장금과 계금에게 각각 쌀과 콩 15석씩을 하사했다.
이후 대장금이 실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544년(중종 39년) 2월 3일이다. 이 무렵, 중종의 병증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중종은 이미 57세의 노구였고,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증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병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은 당시 자신의 병을 오로지 대장금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이런 일은 조선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그만큼 중종은 대장금을 신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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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사극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
그러나 대신들은 항상 그것이 불만이었다. 왕이 일개 의녀 말만 듣고 의원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틈만 나면 의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종은 그들보다는 대장금의 말을 존중했다. 중종은 의정부와 중추부, 육조, 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등이 문안하러 오면 대장금으로 하여금 자신의 병증에 대해 설명하도록 했다.
사실, 그 무렵 중종의 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종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여러 차례 의원을 들여보냈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장금이 대전에서 나와 중종의 병증을 설명했다.
“지난밤 주상의 옥체에 번열이 있는 것 같아 야인건수, 양격산, 지보단을 올렸습니다.”
이에 의원 박세거가 들어가 진찰하고 또 한 번 약을 올렸다. 낮 12시에 대장금이 다시 나와 왕의 상태를 설명했다.
“오전에 번열이 있었으므로 정화수에 소합원을 타서 올렸습니다.”
저녁에 박세거가 다시 들어가 진찰했다. 그리고 건갈, 승마, 황련, 맥문동, 인삼을 첨가한 강활산 및 오미자차, 검은콩, 대나무 잎 등을 달인 물을 올렸다. 모두 다 기력을 보충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소용했다. 1533년 11월 15일 어두워질 무렵에 대장금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상의 징후가 위급하십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전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중종은 승하했다. 중종의 승하와 함께 대장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다. 왕이 죽었으니, 왕을 치료했던 그녀 역시 법에 따라 죄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특별한 실수를 한 것은 아니니 의녀 직분은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내의원에 계속 머물러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장금 외에도 실록은 뛰어난 의술을 가졌던 의녀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성종대의 의녀로서 충치 제거술에 남다른 재주를 가졌던 장덕과 귀금, 제독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분이, 그리고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남긴 애종 등이 그들이다.
작가
용어설명- 체아직
조선시대에 교대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거나 주기 위해 만든 관직. 정해진 녹봉 없이 1년에 몇 차례 근무평정에 따라 교체되며, 복무기간 동안 녹봉을 받는다. 체아는 고려 말기에 처음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나의 제도로서 정립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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