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전화로 부르는 ‘공중택시’ , 경성~광주 정기 항공노선까지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조선 민간항공 개척자 신용욱, 조선인 첫 1등 비행사 겸 2등 항공사
입력 2023.02.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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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욱은 조선의 첫 1등비행사 겸 2등항공사였다. 아이스크림 행상까지 하며 일본에서 어렵사리 비행술을 배웠다. 사진은 서른 셋의 신용욱. 1934년 7월 언론사상 최초로 삼남지방 수재 '공중 취재' 당시 신문에 난 사진이다. 조선일보 1934년7월25일자
‘공중(空中) 택시, 반시간 30원’(조선일보 1936년 9월16일)
‘에어 택시’ 등장을 알리는 기사 제목이다. 이 땅에서 운영하는 첨단 운송서비스였다. 조선인 비행사가 운영하는 항공회사가 맡았다.경성을 비롯, 울산, 대구, 이리, 평양, 신의주, 함흥, 청진 등 비행장이 있는 조선 각 도시를 연결했다. 3인승 경비행기의 1인 티켓값은 시간당 60원이었다.
에어택시 사업허가를 받은 이는 신(愼)항공주식회사의 신용욱(愼鏞頊1901~1961). 1등 비행사와 2등 항공사 면허를 가진 민간 조종사였다. 신용욱은 1936년 9월12일자로 경성과 이리를 잇는 정기항공 여객 노선도 따냈다. 조선 최초의 민간 항공운송영업허가였다. 매주 1회 화요일 왕복하는 조건이었다.
비행기종은 와사전식(瓦斯電式)K·R 이형(二型) 조선동포기(同胞機)로서 경비행기(輕飛行機)로 우수한 국산기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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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택시'(공중 택시) 등장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6년9월16일자 기사
◇경성上空 일주 5원, 인천 상공 일주는 10원
1936년 10월13일, 경성~이리 정기운항이 시작됐다. 오전 11시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승객 3명을 태우고, 정오에 이리에 도착한 뒤, 다시 승객을 싣고 오후 1시에 출발해 오후2시 경성에 도착했다. 요금은 1인당 15원. 화물료도1Kg당 1원씩 받았다. 매주 화요일 오전 9시40분 장곡천정 (長谷川町·소공동)에서 여의도비행장까지 자동차로 가는 셔틀 서비스도 포함됐다. (‘경성이리정기항공 13일부터 개통’, 조선일보 1936년10월13일)
이날자 기사엔 ‘에어택시’ 서비스도 안내했다. 전보나 전화 주문으로 예약을 받아 승객을 운송하고, 요금은 시간 당 60원으로 소개했다. 왕복 비행편 할인도 등장했다. 돌아오는 비행기표는 반액으로 할인하고, 만약 1박을 체류할 때는 여관비까지 대준다고 했다. ‘에어 택시’ 영업을 위한 특별 프로모션이었다.
신(愼)항공회사는 ‘유람 비행’ 영업도 시작했다. 경성 상공 일주는 1인당 5원, 인천 상공 일주는 10원을 받았다. 웬만한 자동차 요금보다 더 싸다는 말까지 나왔다.항공 대중화를 위한 시도였다.
◇1938년 경성~광주 노선 개설
신항공회사는 1938년5월14일 경성~이리 노선을 연장해 광주 운행을 시작했다. 1937년11월 착수한 10만평 규모 광주비행장이 완공되면서부터다. 운항 횟수도 주3회(화, 목, 토)로 늘렸다. 티켓값도 열차 2등칸 수준으로 인하했다. 경성~이리 구간은 편도 12원으로 내리고, 신설된 이리~광주 구간은 6원, 경성~광주는 18원으로 정했다. 광주 노선 취항을 위해 당시 최신 기종인 미국 비치크래프트사(社)의 경비행기를 구매하기도 했다. 자동차보다 먼저 찾아온 항공 시대의 개막이었다.
◇조선 유일의 민간항공 노선
조선의 항공업은 1929년 일본항공운송㈜이 일본, 조선, 만주를 잇는 화물, 우편 정기 항공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출발했다. 그해 9월 동경-대련(기항지는 오사카, 후쿠오카, 울산, 경성, 평양)을 잇는 정기 여객노선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1939년 기준, 동경-경성-신경, 경성-대련을 연결하는 간선을 비롯, 경성-청진, 경성-광주 노선과 만주국과 연락하는 신경-청진, 신경-중강진, 동경-경성-대련을 포함하는 7개 노선이 운항중이었다. 그 중 경성-광주 노선만 신(愼)항공사업사가 운영하는 조선 유일의 민간항공노선이었다.
◇법학도에서 비행사의 꿈 도전
전북 고창 출신인 신용욱은 원래 법학도였다. 1921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경성법학전수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중학시절부터 꿈꾼 비행가를 포기할 수없었다. ‘창을 여니 하늘이 높기도 하다, 높고도 넓고 깨끗한 저 무변창공으로 새와 같이 훨-훨- 날아봤으면! 이것이 내가 법학전문학교와 휘문학교의 교실에 앉아 늘 공상하던 영상이었다.’(신용욱, ‘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삼천리 제7권 제6호)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자퇴한 스무살 신용욱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처음엔 비행기 공장에 들어가 기름 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까소링’냄새 맡는 것도 낙으로 여기며 직공으로 일했다. ‘누가 잘타더란 소문도 얻어 들으며 아침에 날이 밝기와 같이 비행기 공장에 달려가 일몰할 때에야, 차디찬 하숙에 돌아오곤 하였다.’
신용욱은 1922년3월 오쿠리(小栗)비행학교를 다니면서 3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7년 2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1932년12월 입천(立 川)육군비행학교를 수료해 1등 비행사 면허, 1934년 2등 항공사 면허를 취득했다. 조선인 중 1등 비행사 면허와 2등 항공사 면허를 가장 먼저 취득한 사람이 신용욱이었다.
◇아이스크림 행상으로 학비 충당
비행술을 배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유류비만 시간당 평균 14~15원이 들었다. ‘이리하야 수년 있는 동안 연습 비행기를 사느라고 또는 모든 학용품의 비용에 쓰느라고 내가 소비한 돈이 실로 14~15만원의 거액에 미쳤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비행가 되려는 대가로 들어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집 재산의 대부분은 여기에 기울어 들었다.’(‘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140쪽 삼천리 제7권 제6호)
조부는 ‘노망난 짓을 한다’고 학비와 생활비까지 끊었다. 신용욱은 이튿날부터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1925년의 일이었다. 3원 어치 물건을 떼다가 하루종일 팔면 12~13원은 너끈히 벌었다고 한다. 비행 동료였던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이 병석에 있을 때, 이 아이스크림 판 돈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28년 귀국한 신용욱은 이듬해 5월3일 조선비행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했다. 일제하 일본을 제외하면 유일한 전문비행학교였다. 조선인 스스로 비행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신용욱의 본명은 신용인(愼鏞寅)으로 1930년대초 개명했다고 한다.
◇국경항로 개척
비행학교 설립에 사재를 쏟아부었지만, 곧 재정난에 맞닥뜨렸다. 신용욱은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총독부 항공과 촉탁으로 북조선 국경항로 개척과 위탁비행을 맡았다. 당시 총독부는 만주국과 공동으로 국경 지역의 무장세력을 토벌할 목적으로 북선(北鮮·신의주와 중강진)항로 개설을 추진했다. 신용욱은 1933년8월30일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1933년9월3일 선만 국경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조선군사령부는 신용욱에게 국경 경비비행 업무를 맡기려했으나 신용욱은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 비행학교 동문이자 조선비행학교 동료 교관인 후지타(藤田武明)는 ‘1934년에는 선만(鮮滿) 국경에서는 비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와중에서 신 비행사가 경비비행에 종사하였다. 그는 날을 수 없었다. 아니 날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 독립을 외치는 선비(鮮匪)라 칭하는 일단도 포함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정안기,’대한민국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연구’21쪽 주 5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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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욱의 애기 살무손 2A2형 프로펠러 경비행기. 1934년 7월24일 이 비행기를 몰고 경성부터 대구까지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수재 항공촬영을 단행해 화제를 모았다. 조선일보 1934년 7월25일자
◇전용기로 신문 空輸
신용욱은 신문사의 긴급 재난보도에 기여했다. 1934년7월 삼남 지역(경상, 호남, 충청)에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이재민이 대거 발생하고, 경부선과 호남선이 끊겼다.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조선일보는 수해 취재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전용기를 투입했다. 신용욱이 그 역할을 맡았다. 7월24일 오후1시53분 신용욱은 살무손 2A2형 경비행기를 몰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사진 담당 후지다 기관사와 동행했다. 추풍령을 넘어 대구 연병장에 착륙한 뒤 수해상황을 신문사에 보고하고, 공중에서 촬영한 수해 사진을 기차 편으로 올려보냈다. 당시 촬영한 사진 4장이 7월26일자 석간 3면(‘機上촬영제1보’)을 장식했다. 범람한 낙동강, 물에 잠긴 소강평야와 함께 자욱한 구름바다를 헤치고 추풍령을 넘어가는 비행기 사진이 실렸다. 국내 언론사상 첫 공중 취재 보도였다. 신용욱은 7월26일 삼랑진 일대를 비행하고 이재민들에게 식빵과 의약품을 투하하고 7월29일 오후5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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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욱 비행사가 1934년 7월24일 후지다 기관사와 함께 촬영한 수재 사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수재 현장 참상 규모는 엄청났다. 조선일보는 1934년 7월27일 호외를 내고 이 항공 사진을 실었다.
비행기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일보는 1935년 국내 언론사 최초로 전용기 살무손2A2형을 구입했다. 조종사는 신용욱이었다. 신용욱의 첫 전용기 운항은 조선일보 1935년 1월3일자(‘본사機서 조감한 元日의 장안風光’)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실렸다. 전용기는 그해 10월 대구를 시작으로 영천과 포항에 신문을 공수했다. 11월엔 호남 지역과 원산, 함흥 등 북선(北鮮)까지 확대하면서 신문의 성가(聲價)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허망한 죽음
신용욱은 1936년 조선 최초의 민간항공회사인 신(愼)항공사업사를 설립했고, 1941년 활공기 제작 전문의 조선경비행기공업과 비행기 수리 전문의 조선항공공업소를 설립했다. 전시 체제하에서 협력했다는 이유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회부됐다. 하지만 ‘죄상이 별로 없고 동정할 여지가 있다’는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 판단에 따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신용욱은 광복 후 첫 민간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Korea National Airline·KNA)를 설립했다. 2,3대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됐다.하지만 운은 여기까지였다. 1958년 항공사 소속 창랑호가 납북됐다. 국내 첫 항공기 피랍사건이었다. 그 여파로 적자가 누적되면서 항공사 운영이 어려워졌고, 196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신용욱이 세운 KNA는 대한항공 전신이 됐다. 그는 ‘민간항공산업의 개척자’(정안기)로 평가받는다.
◇참고자료
신용욱, 航程삼천리-비행15년-나의 비행가로서의 감회’, 삼천리 제7권 제6호, 1935년7월
정안기,대한민국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의 연구,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5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 랜덤하우스, 200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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