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 보장된 요직 중의 요직 … 학문 · 인격 · 가문 허물없어야 등용
입력2022.11.11. 오전 9:16 수정2022.11.11. 오전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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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카페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13) ‘문관 선호도 1위 직장’ 홍문관
학술기관이면서 왕에게 정치 자문… 사헌부 · 사간원이 제 기능 못할 때 중재 · 방향 제시하기도
청렴한 관리들 모여 ‘청연각’ 이라고도 불려… ‘문형’ 대제학은 정승보다 명예롭게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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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의 상징 = 홍문관(弘文館)은 조선시대 문관들이 가장 선호하던 직장이었다. 홍문관 관원들의 주요 업무는 궁중의 서적과 역사기록물의 관리 및 문서의 처리였지만, 보다 중요한 역할은 각종 현실 문제에 대한 왕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었다. 학술적인 기관이면서도 왕을 위한 정치 자문기관이었기에 왕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언론 삼사로 불리며 국가 대사에 대한 의견을 내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출세가 보장된 직장이었으므로 문관들의 선호도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홍문관이라는 명칭은 당나라에서 건너왔다. 당나라에서는 수문관이라는 학문 기관이 있었는데, 이것이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이 명칭이 고려시대에 수입되었다. 고려시대에 학문 기관인 숭문관이라는 이름의 관청이 있었는데, 고려 성종이 홍문관으로 개명한 것이다.
조선 초기엔 홍문관 역할을 하던 곳은 세종이 만든 집현전이었고, 홍문관 관원의 직책도 집현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하지만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정치적 언론기관의 역할도 했던 집현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세조는 집현전을 없애고 왕의 교서(왕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작성하던 예문관에 그 기능을 넘겨버렸다.
이후, 1463년 양성지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을 홍문관이라고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의 홍문관은 도서관 기능만 했다. 그러다 성종 대에 이르러 집현전의 기능과 관직을 부활시켜 고스란히 홍문관에 옮겨놓았고, 예문관은 다시 예전에 하던 업무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 학술, 언론, 자문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은 성종 9년(1478년)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임금이 자주 찾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맑고 깨끗한 곳이라고 하여 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청렴한 관리들이 근무하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청연각이라는 이름처럼 홍문관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 되었고, 이곳의 관원이 된다는 것은 곧 출세 가도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조선시대의 정승, 판서 중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홍문관의 관원이 되는 일은 매우 까다로웠다. 왕이 내리는 교서를 작성할 만한 문장력과 왕에게 경서를 강의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춰야 했다. 거기다 출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고, 등용될 때는 홍문관, 이조, 의정부의 투표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만큼 홍문관의 관직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홍문관을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언론 삼사라 부른다고 했는데, 역할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대개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 언론 양사라고 하고, 홍문관은 별도의 언론사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어떤 사안을 두고 왕과 의견을 달리하며 대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홍문관은 중재를 하거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또 사헌부나 사간원이 신하의 잘못에 대해 논하지 않을 때 이를 지적하는 역할도 했다.
예컨대, 선조 1년 10월 4일에 홍문관은 이런 내용을 선조에게 올린다. “양사가 환관 주태문이 능침(陵寢)의 위전(位田: 관아, 학교, 사원 등의 유지를 위해 설정된 토지)을 남몰래 사사(寺社: 절과 사당)에 옮겨 줘 주상의 의중을 시험하려고 한 간사한 행동에 대해서 논핵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정계(停啓: 임금에게 보고하는 죄인 문건인 전계에서 죄인의 이름을 빼는 것)했고, 간원은 무심하게 방관만 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이들은 대간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모두 체직(遞職: 직을 바꿔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시키소서.”
여기서 말하는 양사란 사헌부와 사간원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양사가 환관 주태문의 비리를 알고 비판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주태문을 죄인 명단에서 빼버리고는 방관했으니, 사헌부 관원들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선조는 홍문관의 말을 듣고 양사의 관원을 모두 체직시켜 버렸다. 이렇듯 홍문관은 언론 양사가 제 기능을 하지 않을 때, 양사를 공격하거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가장 영예로운 선비, 문형 = 홍문관의 관원은 정1품 영사 1인을 비롯해 대제학 1인(정2품), 제학 1인(종2품), 부제학 1인(정3품) 외에 직제학 1인(정3품), 전한 1인(종3품), 응교 1인(정4품), 부응교 1인(종4품), 교리 2인(정5품), 부교리 2인(종5품), 수찬 2인(정6품), 부수찬 2인(종6품), 박사 1인(정7품), 저작 1인(정8품), 정자 2인(정9품) 등 총 20명이었다. 그러나 정1품인 영사는 의정부 정승이 겸직했기 때문에 홍문관의 최고 직책은 정2품 대제학이었다.
홍문관 대제학은 조선 학문을 맡은 수장으로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최고 책임자를 겸했다. 이 때문에 대제학을 일컬어 ‘학문의 저울’이라는 의미로 ‘문형(文衡)’이라고 불렀다. 나라의 학문을 책임지고, 모든 학자를 대표하는 문형이 된다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엄청난 영예였다. 그래서 조선 선비 사회에서는 집안에서 문형이 나오는 것을 정승이 되는 것보다 더 명예롭게 여겼다고 한다. 문형을 거쳐 정승이 되는 사례는 있었지만, 정승이 되었다고 문형을 반드시 거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승을 선택할 때는 별도의 과정을 거치는 법이 없었으나 문형을 뽑을 때는 반드시 별도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문형을 뽑을 때는 권점(圈點)이라는 과정을 거쳤는데, 권점이란 요직의 관원을 뽑을 때 추천권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천 대상자들의 명단 위에 각기 동그라미 표시를 해 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을 임금이 임명하게 하는 제도다. 이러한 권점법이 가장 엄격하게 시행되던 부서가 바로 홍문관과 예문관이었다. 대제학은 이 두 기관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반드시 권점을 거쳐서 뽑았던 것이다.
권점을 통해 올린 득점 기록은 별도로 보관하게 했는데, 이를 홍문록 또는 도당록이라고 했다. 홍문관이나 예문관에서는 관원을 뽑을 때 반드시 권점 과정을 거쳤는데, 특히 예문관의 한림을 뽑을 땐 권점법을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다. 1차 권점에는 부제학 이하의 모든 현직 관원이 참여했고, 2차 권점에는 의정부와 이조의 당상관이 모두 참여했다. 그리고 여기서 뽑힌 사람들은 다시 역사 시험을 보게 해 최종 합격자를 가리게 했다. 이렇게 홍문관과 예문관의 권점을 통과해 최종 합격된 사람들은 부제학까지는 권점 없이 승진하게 된다. 하지만 한 나라의 학문을 책임진 문형인 대제학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권점을 거쳐야 했다. 대제학 권점 때는 전임 대제학이 모두 참여한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왕이 임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제학은 홍문관이나 예문관 출신이 아니면 될 수 없고, 이 두 기관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권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결코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이 때문에 대제학이 되는 것을 정승이 되는 것보다 더 영예롭게 여겼다.
조선의 예문관과 홍문관을 책임진 역대 문형들을 열거하자면 우선 태조 대에는 권근을 들 수 있고, 태종 대에는 변계량, 세종 대에는 윤회,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있었다. 또 세조 대에는 신숙주와 최항이 있었으며, 성종 대에는 어세겸과 홍귀달이 있었다. 중종시대에는 신용개, 남곤, 이행, 김안로, 소세양, 김안국, 성세창 등 7명이었고, 선조 대에는 박순, 이황, 노수신, 김귀영, 이이, 이산해, 류성룡, 이양원,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홍성민, 이항복, 심희수, 이귀구, 이호민, 유근 등 17명이나 되었다.
선조 대에 이렇듯 문형이 많았던 것은 선조가 오랫동안 재위한 데다 선조 대가 조선사를 통틀어 학문적으로 가장 많은 인재가 배출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대의 문형으로는 이이첨을 꼽고, 인조 대에는 신흠, 김류, 최명길, 이식, 김상헌, 이경석, 이명한, 정홍명, 조경 등을 꼽는다. 숙종 대의 문형으로는 박태상, 남구만, 남용익, 이여 등을 꼽으며, 영조 대에는 조문명, 이덕수, 김양택, 서명응, 이휘지, 이복원, 정실, 황경원 등이 꼽힌다. 정조 대의 문형으로는 오재순, 김종수, 서유신 등이 있었다.
하지만 순조 이후 외척 독재가 진행되고 국운이 기울면서 문형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조정이 외척들에 의해 장악되면서 문형 역시 그저 하나의 고위직 벼슬로 전락해 더 이상 선비의 표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청요직(淸要職)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합친 말로 청직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 그리고 사관의 임무와 왕의 교서 작성을 맡은 예문관을 일컫는다. 요직은 육조 가운데 이조·예조·병조를 뜻한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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