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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저런 아야기

전쟁은 ‘이길 생각’이 아니라 ‘안할 생각’을 하라···‘서부전선 이상없다’

by 까망잉크 2023. 2. 26.

전쟁은 ‘이길 생각’이 아니라 ‘안할 생각’을 하라···‘서부전선 이상없다’

입력 : 2023.02.25 08:00
백승찬 기자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묘사하는 전장은 곧 지옥도다. 넷플릭스 제공

‘오마주’는 주말에 볼 만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찾아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꼬박 1년이 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습니다. 죽음과 피난의 상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평화의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더 절망스럽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독일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감독 에드워드 버거)는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1929)을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은 강렬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 역시 원작의 메시지를 공유합니다.

영화는 참혹한 전장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신들이 마치 영원히 그곳에 있었던 정물처럼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어수룩해 보이는 신병 하인리히가 간신히 용기를 내 진격합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순진무구한 학생 파울은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한다. 넷플릭스 제공

파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넷플릭스 제공

시간이 흘러 주인공 파울(펠릭스 카머러)은 들뜬 마음에 자원입대합니다. ‘황제, 신, 조국을 위해 싸우라’는 선동에 고무돼 소풍이라도 가는 양 친구들과 함께합니다. 파울은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통과한 뒤 새 군복을 받습니다. 군복에 하인리히라는 명찰이 박혀 있었다는 점에서 서두에 등장한 하인리히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파울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도착한 첫날부터 프랑스군의 폭격으로 몇몇 동료들이 사망합니다. 파울이 고참병이 되는 사이 독일군의 패색은 짙어집니다. 자존심 혹은 전황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에 전쟁을 계속하려는 장군이 있고,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손실을 막으려는 정치가가 있습니다. 이 기회에 독일을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프랑스의 완강함에 휴전 협상은 지루하게 늘어집니다. 정치인과 장군이 안락한 거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최전방에선 또 다른 젊은 군인들이 죽어갑니다.

파울은 적으로 만난 프랑스인을 찌른 뒤 곧 그를 다시 살려내려 한다. 넷플릭스 제공

전장에서 프랑스군과 마주친 파울이 그를 사정 없이 찔렀다가 피를 토하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다시 살려보려 하는 장면은 영화 중반부 하이라이트입니다. 파울은 적의 상처에 거즈를 대고 입에 물을 흘려 넣기도 하지만, 결국 적은 숨을 거둡니다. 파울은 죽은 적군의 지갑을 뒤집니다. 죽은 프랑스인은 군인이기 이전 인쇄공이었고, 아내와 딸이 있는 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방금 파울이 죽인 이는 추상적인 ‘적’이 아닌, 가족과 직업과 자신만의 삶이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휴전 협정이 맺어져 발효를 앞둡니다. 장군은 협정이 발효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것을 독려합니다. 남은 시간은 단 15분입니다. 파울은 15분을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15분간 누구도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전쟁영화가 종종 보여주는 군인의 희생정신에 대한 경의, 전쟁 이후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 무엇보다 무사히 귀향한 주인공을 통한 안도감이 없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어떠한 전쟁도 무용하다고 설득합니다. 근래 전쟁영화 중 가장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전하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19일(현지시간) 열린 제76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7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다음 달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외국어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작품상, 각색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오른 상태입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선 사람이 죽어갑니다. 한반도에도 남한과 북한 사이 ‘선전포고’ 같은 날 선 언어가 오갑니다. 승리의 확신, 적에 대한 저주가 있을 뿐, 평화의 언어는 찾기 힘듭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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