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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이야기外 더 오래

강형구 작가의 야설 천하

by 까망잉크 2023. 3. 23.

[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 천하

꾀많은 제자(3)절호의 기회

입력 2020. 09. 20. 18:43

■강형구 작가의 전설따라 남도삼백리

▶꾀 많은 제자(3) 절호의 기회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어린 녀석이 넙죽 머리를 조아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설마 제가 스승님을 도적놈을 만들려고 그러겠습니까? 제게 다 계략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혼자 사시는 어려움을 면하고 장가 드실 수 있습니다.”

“뭐라! 이놈아! 난 이렇게 혼자 사는 게 좋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 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스승님,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장가 드실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에잇! 이 맹랑한 녀석! 내일부터 서당에 다시는 나오지 마라! 아무리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다니!....... 어험!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놈!”

‘글줄이나 읽고 아이들에게 인륜도덕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선비에게 그런 개망나니나 할 짓을 하라니? 내 이렇게 혼자 고달프게 살다 종국에는 굶어 죽더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이훈장은 철부지 어린 제자의 말에 노발대발 화가 나서 사납게 소리치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요히 누그러뜨리고는 벌떡 일어나 어린 녀석을 따돌릴 양으로 서당 문을 열고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어린 녀석이 급하게 일어나 이훈장 뒤를 따르며 말했다.

“스승님, 내일 새벽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절호의 기회라? 정말 저 어린 녀석이 단단히 무슨 계책이라도 세웠단 말인가?’ 어린 녀석이 자꾸 이훈장에게 다짐을 주는 것이었다.

이훈장은 어린 녀석이 자신의 신세를 아주 망쳐놓으려고 별스런 짓을 다 시킨다 싶어 기가 막혔으나 내심 그 여인에게 장가 들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할까하는 괴이한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슬그머니 불쑥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아내를 여의고 홀로 고단하게 살아오면서 삶이 주는 이별의 고통을 톡톡히 실감하고 살아가는 이훈장이었다. 아내가 있었다면 오순도순 세상일 정담을 나눠가면서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기쁨을 나누고, 궂은일은 궂은일대로 함께 대처하며 살아가는 맛을 마음껏 누릴 것인데 모진 것이 병이라고 시집오고 얼마 아니 되어 서로 백년해로를 할 연분이 아니었던지 덜컥 병이 들어 몸이 아파 누워 버렸으니 좋은 약을 지어 먹이고 안달하며 병수발 하는 데만도 꼬박 두해가 걸렸던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짝을 만나 건강하게 살다가 애 낳고 길러 시집장가 보내고 또 손자손녀도 보고 늙어 죽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인데 이훈장에게는 그런 평탄한 길이 당최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보낸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정도 그러하려니와 외롭게 혼자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그 인생이란 것이 주는 고통을 삭이며 하루하루 감내하는 맛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밤새워 뜬눈으로 고민하다가 새벽녘이 되자 이훈장은 ‘세상사 일이란 게 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린 녀석의 하는 말에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 결 자신도 모르게 굳은 결심을 하게 했고, 급기야 이훈장을 순간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최씨 부인이 산다는 그 마을로 향하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희뿌옇게 새벽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오는 청량한 들길을 얼마간 걸어 최씨 부인이 사는 그 집 뒤로 돌아가 누가 볼 새라 두리번거리며 정말 도둑놈처럼 슬그머니 돌담 너머로 집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멀리 있는 샘으로 물이라도 길러 간 것일까? 아니면 어린 녀석이 어제 은밀히 말했던 것이 맞기라도 한 것일까? 집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이 훈장은 자꾸 콩닥거리는 가슴을 감싸 안고 주위를 살피면서 도둑고양이처럼 담을 넘어가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고 방안을 살펴보았다. 간밤에 잠을 잔 듯 보이는 이부자리는 그대로 방 아랫목에 펴져 있었는데 최씨 부인은 거기 없었다.

만약 최씨 부인이 방안에 자고 있었다면 아뿔싸!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나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냅다 줄행랑을 놓으면 그만이었는데 ‘방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어린 녀석의 무슨 꿍꿍이 계략이 들어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그리고 이제는 없는 용기가 이훈장의 가슴 한 복판에서 불길같이 용솟음쳐 올랐다. 그것은 최씨 부인에 대한 사랑하는 남녀 간이 나눈다는 그 뜨거운 연모의 정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훈장의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이성을 처음 대하는 첫사랑에 가슴 떨려하는 어린사내처럼 심장이 자신도 모르게 문득 사납게 물 방아질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으음! 여기까지 와서 내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혹, 그 어린 녀석 덕분에 내 고단한 홀아비 신세를 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과부 좋고! 홀아비 좋고! 이놈 인생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겠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마침내 어린 녀석의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결정하기에 이른 이훈장은 대담하게 최씨 부인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방 아랫목에 깔려있는 비단 이불 속으로 생쥐처럼 쏙 기어들어가 어린 녀석이 시키는 대로 거기 벌렁 드러누웠다. 보송보송한 이불속에 배인 젊은 여인의 비릿한 살 향내와 분 냄새가 순간 이 훈장의 코끝을 물큰 파고들었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전설따라 남도삼백리

▶꾀 많은 제자 (4·끝)기발한 꾀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이 소란하다 싶더니 그 어린 제자 녀석이 어느 결에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최씨 부인을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아이고! 저놈! 새벽부터 또 뭣 하러 왔느냐!”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집주인 최씨 부인이 홀연 나타나 녀석을 호통 치는 소리가 이훈장의 귀 고막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이훈장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불 속에 쥐 죽은 듯이 누워 바깥소리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우리 스승님 찾으러 왔어요. 우리 스승님 여기 계시지요?”

어린 녀석이 최씨 부인을 바라보며 당돌하게 소리쳤다.

“뭐? 뭐라? 이놈! 왜 너의 스승님이 자기 집 두고 여기서 주무시겠느냐! 어서 썩 가거라!”

성난 최씨 부인이 대뜸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사정없이 휘저으며 녀석을 쫓았다. 순간 녀석은 재빨리 최씨 부인의 부지깽이를 피해 마루로 폴짝 뛰어 오르더니 안방 문을 번쩍 열어젖히고 들어가 이불을 홱 들어올렸다. 그 이불 속에는 이훈장이 놀란 토끼눈을 뜨고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여기 우리 스승님이 계신데 무슨 거짓말을 하시나요. 같이 자놓고는!”

“뭐? 뭐라!……”

간밤 자고 일어난 자신의 이부자리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서당 이훈장이 최씨 부인의 휘둥그렇게 뜬 눈 안 가득 들어와 박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지금 귀신에 씌워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최씨 부인은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다시금 가다듬으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눈 안 가득 들어온 것은 분명 이웃 마을의 서당 이훈장이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어떻게 이훈장이 자신의 안방 이불 속에 저렇게 벌렁 누워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정녕 하늘에 맹세코 지난밤을 혼자 잤는데 말이다. 최씨 부인은 순간 정신이 아득하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질 뻔 했다. 참으로 경을 칠일이었다. 아녀자의 강직한 윤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정결한 수절 과부에 열녀문이라는 허울 좋은 굴레가 저 멀리 달아나는 찰나였다.

‘아이쿠머니나! 남우세스러워라! 이 이를 어쩐다?’

최씨 부인은 희미하게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가누었다. 이제 꼼짝없이 그녀와 이훈장은 지난밤을 함께 이 방에서 지내버린 꼴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서로 사랑하며 좋아지내기에 같이 잔거라고 소문이 날 테고, 저 어린 녀석은 마을에 크게 소문을 내며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증거를 들이댈 테고, 이웃들에게 창피는 톡톡히 당할 테고, ‘아서라! 이왕에 그럴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최씨 부인은 문득 안방에서 민망한 듯 어기적거리며 말똥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훈장을 붉게 달은 얼굴로 수줍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최씨 부인의 그 상기된 얼굴과 고운 눈빛을 확인한 이훈장은 순간 휴!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멋쩍은 표정으로 ‘허허! 그놈 참! 허허! 그놈 참!’ 하는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자꾸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어린 제자 녀석은 어떻게 최씨 부인이 그 이른 시각 집에 없을 줄을 알았을까? 그리고 제 스승을 안전하게 그녀의 안방으로 끌어들일 대담하고도 기발한 꾀를 생각해 냈던 것일까?

사실은 어제 오후 서당이 파하고 집으로 쫓겨 간 어린 녀석이 또 오후 늦게 이훈장을 다시 찾아왔던 것이다.

헛소리를 해대는 어린 녀석을 겨우 쫓아 보내고 서당에서 홀로 쓸쓸하게 서책을 보고 있는데 어느 결 서당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또 그 어린 녀석이 ‘스승님!’ 하고 대뜸 부르며 이훈장 옆으로 다가와 앉는 것이었다. ‘이놈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려나?’ 싶은 이훈장은 가만히 그 어린 녀석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허튼 소리를 하면 이번에는 아주 붙잡아 놓고 크게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스승님, 실은 제가 듣기에 내일 새벽 그 최씨 부인이 옆 마을 친정집에 급히 쓸 물건이 있어 그것을 전해주러 잠깐 다녀온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스승님은 그 집 안방에 들어가 이부자리 속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시면 장가 드실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그렇게 다짐을 준 어린 녀석이 이훈장의 답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서당문밖으로 뛰어 달아나 버렸다. 최씨 부인네와 한 마을에 사는 어린 녀석은 자신의 할머니가 최씨 부인 사정을 잘 아는 누구에겐가 듣고 와서 어머니와 나누는 말을 듣고는 홀아비 제 스승 장가보낼 그런 기가 막힌 꾀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 최씨 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때는 이때다!’하고 들이닥쳤던 것이다.

빛나는 허울들만 잔뜩 쓰고 살아가는 이 고단한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멍에 같은 그 허울을 단박에 벗겨버리고, 홀아비 스승과 젊은 과부 최씨 부인의 혼례를 성사 시킨 그 어린 녀석이 참으로 대견하지 않은가! 잘나서 높이 출세했다고 온갖 교만 떠는 어느 제자보다도 실상은 그런 제자가 진짜 제자가 아니겠는가싶다.<끝>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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