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봉의 순수비 복제품으로 바뀌고 경관도 상전벽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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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협동조합(조성봉 사진갤러리) 제공
북한산에는 비봉(碑峰)이 있다. 정상에 진흥왕 순수비라는 비석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은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인물로 유명한데, 자신이 넓힌 땅을 직접 밟아보고 그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다. ‘순수(巡狩)’는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는 일을 뜻한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외에도 경남 창녕, 그리고 함남 마운령과 황초령에서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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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의 기념물이다. 진흥왕은 553년에 백제 땅이었던 한강 하류를 빼앗았으며, 신라는 이를 기반으로 100여년 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북한산에 비석을 세운 이유는 새로운 영토, 특히 한강 하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비봉은 북한산 줄기의 서남쪽에 위치해 한강 하류는 물론이고, 맑은 날에는 서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순수비에는 총탄 자국이 많다. 6·25전쟁 때 감제고지인 비봉을 둘러싸고 벌인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아닐까?
비봉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웬만한 담력으로는 오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까지 순수비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비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순수비의 진가를 판별한 이는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다. 1816년 김정희는 직접 비봉에 올라가 순수비임을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다. 김정희는 이듬해 한 번 더 이곳을 찾았으며, 자신이 감정한 내용을 순수비 옆면에 새겼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심각한 문화재 훼손이라 할 수 있다.
1971년(왼쪽)과 2021년(오른쪽)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별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다. 국보 제3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은 순수비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건립된 지 1400여년 만인 1972년 산 아래로 옮겼다. 현재 순수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사실 더 큰 차이는 비봉에서 조망하는 경관의 변화이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서울 서남부와 부천시 일대이다. 논밭만 펼쳐져 있던 곳이 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변모하였다. 하나도 보이지 않던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놓였다. 상전벽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50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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