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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by 까망잉크 2023. 6. 3.
 

[시인의 詩 읽기]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입력2023.06.02. 오전 5:02

어느새 태풍이 시작되는 여름이다. 올여름 엄청난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듣고 장화를 사야겠다는 지난해의 결심이 떠올랐다. 매해 여름 비가 늘고 있다는 기분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창밖으로 바라보는 비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문제다. 차분해지는가 싶다가도 불쑥 켕겼던 일이 떠오르고, 그런가 싶다가도 안 좋은 일과 함께 안 좋은 사람의 얼굴까지 밀려온다.

서경온 시인의 태풍경보는 태풍이 도착하고 있는 와중의 뒤숭숭한 밤 풍경을 그리고 있다. 가지들이 헝클어지고 소나기가 다그치는 모습에서 아직까지 붙들려 있는 한 존재를 떠올린다. 과연 별일이었을까.

우리는 끌려다닌다. 빚에 끌려다니고 사람과 풀지 못한 한에 끌려다니고… 그 모두가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다. 태풍의 경로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도 그렇게 오는 것만 같다. 비껴가려고 하다가도 덮치고, 비껴갈 것 같다가도 당하고 마는 우리의 지난날은 왜 그리 아우성인지.

멀리서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다. 비껴간다고는 하지만 그 후에도, 그 후에도 태풍 소식은 들려올 것이다.

엊그제 비가 많이 내리는 밤에 우산을 쓰고 나간 적이 있었다. 허름한 신발을 신고 나갔더니 금방 발이 젖었다. 신발 속의 양말은 신발과 발 사이에서 금방 귀찮은 것이 됐다. 과거의 한때 우리가 만났던 사람도 그 양말짝처럼 귀찮은 존재가 돼버린 것은 아닌지. 감히 용서라는 말을 앞세워 잊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장화를 사러 나가야겠다. 태풍을 기다리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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