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徐載弼);-본관은 대구(大邱),독립운동가.
서광효의 아들로 7세에 한학을 수학,1879년(고종 16)13세에 전강에 장원했다. 김옥균,서광범 등 개화 인사들과 교유,1883년(고종 20)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돌아와 왕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진언,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이 해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참형 혹은 자살했다. 미국 유학중 미국에 귀화,펜실베니아 주 웩스바레 중학교를 다니고, 1888년 라파에트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졸업 후 가필드 병원에서 세균학을 연구, 1896년 민씨일파가 몰락하자 귀국했다.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교섭, 정부 예산 5천원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모화관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고,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출국이 강요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19년 3.1운동을 전해 듣고 잡지<이브닝레저>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구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 후원회를 만들었다. 1919년 겨울부터 펜실베니아 대학의 강의를 맡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와연결,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했다. 1922년 워싱턴의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의 370여 단체가서명한 연판장을 돌렸고,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했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대한제국 말기 자주민권과 민족자강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석조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사적 제32호. 높이 14.28m, 너비 11.48m.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沈宜碩)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설계자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만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1917년 수리공사를 했으며 1928년 기초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벽체 안쪽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1979년 금화터널 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동판이 묻혀 있다.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석재 초석이 있는데 이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립문의 뜻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에 있는 돌 문. 1897년 11월 20일에 독립(獨立) 협회(協會)가 각계 각층 국민(國民)의 헌금으로, 한국(韓國)이 청국(淸國)의 기반(羈絆)을 벗어난 것을 기념(記念)할 목적(目的)으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던 것인 데, 1980년 현재(現在) 자리로 옮겨짐 |
4괘는 건( ), 곤( ), 리( ), 감( )
- 4괘의 의미 :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효(爻)의 조합을 통해 구체화한 것이다.
|
내용출처 : 검색결과 |
순국선열추념탑은 민족자존을 위해 일제 침략에 항거한 선열들의 투쟁과 이로 인해 이곳 형무소를 비롯한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고난당하고 순국하신 모든 분들을 추념하기 위한 탑이라 한다.
<독립관(獨立館)>은 조선시대 때 중국 사신에게 영접과 전송연회를 베풀던 '모화관(慕華館)' 건물이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사용하지 않다가 1897년 독립협회의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위해 사무실 겸 집회소로 이용됐다. 독립관의 원래 위치 또한 35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져 복원됐다. 현재 독립관 내부에는 순국선열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지만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게 해 창틈 새로 내부를 볼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독립공원 안에는 '서재필선생동상', '3.1독립선언기념탑', '순국선열추념탑'도 함께 있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애쓴 한말 격동기 민족운동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공원 안의 푸른 공간과
휴식의 마당 ..............
격동기의 우리 역사를
상기하며 순국 하신 분에 대한
묵념 을........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0) | 2008.05.12 |
---|---|
1945년의 한강 철교~현재 (0) | 2008.05.07 |
어느 삼대의 애기 (0) | 2008.04.30 |
그 사람과는 원수지간 아니오 ? (0) | 2008.04.22 |
성냥 의 얽힌 이야기 (0) | 2008.04.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