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집모양으로 생긴 탈 것이다. 안에 사람이 들어앉고 앞뒤에서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밑에 붙 은 가마채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한다. 대개 가마뚜껑과 가마 바탕 및 가마채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방석이 곁들어 진다. 가마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
만, 신라 기와에 바퀴 달린 연 비슷한 것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전실 서측벽에 있는 〈주인도 主人圖〉와〈부인도 婦人圖〉 에는 호화로운 가마에 앉아 있는 주인과 부인의 모습이 각각 그려져 있다. ≪고려도경≫에도 채여(采輿)· 견여(肩輿) 등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가마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수레나 가마를 타는 데 차등을 두었던 교여지제(轎輿之制)가 있었다. 이에 따르면, 평교자(平轎子)는 일품과 기로(耆老:60세 이상의 노인), 사인교는 판서 또는 그에 해당하는 관리, 초헌(述軒)은 종2품 이 상, 사인 남여(四人籃輿)는 종2품의 참판 이상, 남여는 3품의 승지와 각 조의 참의 이상, 장보교(帳步轎) 는 하급관원이 탔다. 한편 가마를 타고 대궐의 문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삼정승과 조선 말기 의 청나라 공사에 한정되었다. 가마를 메고 갈 때는 권마성(勸馬聲) 소리를 한다. 권마성이란, 임금이 말 이나 가교를 타고 거동할 때나 봉명관(奉命官)·수령 및 그들의 부인이 쌍교(雙轎)를 타고 행차할 때, 위세를 더하기 위하여 앞에서 하졸들이 목청을 가늘고 길게 빼어 부르던 소리이다. 임금이 거동할 때에 는 사복(司僕)·하인들이, 그 밖의 경우에는 역졸들이 불렀다. 민간에서는 가마를 메고 가다가 맞은편에 서 낯모르는 가마가 오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마끼리 맞대 고 밀어붙이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쪽으로 승화된 것으로, 우리 민속에 가마싸움이라는 놀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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