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역사) 이야기

교만이 하늘을.....

by 까망잉크 2008. 10. 19.

 

교만이 하늘을 찌르더니

 

 

이준민(李俊民)이 이조 참판으로, 허봉(許篈)이 이조 좌랑(정6풍의 낮은 관리였으나 관리 임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관이 선조의 시호를 받고 이를 경하하는 연회를 베풀자,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여기에 참석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손님들은 지쳐 갔지만 술과 음식은 상에 오르지 않았다.

“허 좌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이준민은 몹시 불쾌해했다.

 

이윽고 허봉이 오자 주인이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맞이하고, 좌중도 모두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으나, 이준민은 일부러 안석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봉이 대청에 올라 특석에 앉자 사람들이 모두 어깨를 피하며 나아가 그와 말을 나누고 싶어 했으나, 허봉은 못 본 체하고 건성으로 주인과 몇 마디 나눌 뿐이었다. 술잔이 돌자 허봉이 곧바로 일어나려 했다. 주인이 한사코 만류하여 허봉이 다시 잔을 들긴 했으나 다 비우진 않았다.

 

이것을 본 이준민이 취한 김에 허봉을 노려보다가 짐짓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 늙은이가 복이 없네그려. 좌랑의 어머니 김씨가 처음 우리 집에 청혼을 했는데, 우리 집안에서 응하지 않았네. 그렇지 않았다면 좌랑이 내 아들이 되지 않았겠나.”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였고, 허봉도 기가 꺽여서 그대로 돌아갔다. 허봉이 비록 당시에 명성은 높았지만 낮은 관리였는데도 고관의 연회에서 술잔을 멈추고 기다리게까지 했다.

그 교만함이 옛날 전분(田蚡)이나 합관요(篕寬饒)만큼이나 심하였으니, 불길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그리고 이준민은 재상의 신분으로 기개를 믿고 남을 업신여겨 많은 사람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자기 낭료에게 모욕을 주었으니, 옛날 관부(灌夫)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준민과 허봉은 모두 지위를 믿고 교만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직접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허봉은 송응개, 박근원 등과 율곡을 공격하다가 북쪽 변방으로 귀양 가 죽었고, 아우 허균이 끝내 그 집안을 망쳤다. 이준민은 손자 이위경이 이이첨, 정조, 윤인 등과 한 무리가 되어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다가 주벌되고 집안이 망했다.

 

         

 

**허봉 [許篈, 1551~1588] 본관 양천(陽川). 자 미숙(美叔). 호 하곡(荷谷). 유희춘(柳希春)의 문인.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7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심의겸(沈義謙) 등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77년 교리(校理)가 되고, 1583년 전한(典翰)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내고, 그해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였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선으로 재기용되나 거절하고, 백운산(白雲山) ·인천 ·춘천 등으로 유랑하다가 1588년 금강산에 들어가 병사하였다. 문집에 《하곡집》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고, 편저에 《의례산주(儀禮刪註)》 《북변기사(北邊記事)》 《독역관견(讀易管見)》 《이산잡술(伊山雜述)》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

부친은 초당(草堂) 허엽(許瞱)이며,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오빠이자 허균(許筠)의 형이다.

 

**이위경[李偉卿, 1586~1623): 본관은 전의, 자는 장이(長而)이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으로서 정조(鄭造), 윤인(尹認) 등과 소를 올려 인목대비가 안으로는 무고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역모에 가담했음을 주장하고 폐출할 것을 청했으나, 대사헌 최유원(崔有源), 이지완(李志完)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

1622년에 이이첨의 사주로 강원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과 결탁하여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 백대형, 정조, 윤인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전분(田蚡): 한(漢) 나라 효경제(孝景帝)의 황후(皇后) 전씨(田氏)의 동생으로 무제(武帝) 때 승상(丞相)에까지 올랐는데, 자신이 무제의 외숙임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온갖 불의를 자행한 외척(外戚). 외척의 등용이 정치를 혼란케 할 수 있다하여 훗날 외척을 경계하는데 인용되는 대표적인 인물임.

 

**首鼠兩端 (머리 수, 쥐 서, 두 양, 끝 단): 전한 무제(武帝) 때 외척인 위기후 두영(竇瓔)과 무한후 전분(田蚡)은 세력다툼을 벌이는 앙숙이었다. 전분이 새장가를 들고 축하연을 벌이는 자리에서 두영이 차별대우를 받자 그의 친구인 관부(灌夫)가 술김에 행패를 부렸다. 전분은 관부를 사형에 처하고 그의 가족까지 몰살시키려 했고, 두영은 무제에게 관부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제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은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고 얼버무렸다. 이에 전분은 어사대부를 불러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망설이는 쥐처럼 애매한 태도를 취하느냐”고 책망했다.

수서양단이란 쥐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요리조리 엿보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진퇴나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출전: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출처] 교만이 하늘을 찌르더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