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가 넉넉하다고 지었다네
조선 中宗(중종) 때 명신 김정국(金正國)1485(성종 16)∼1541(중종 36).
그는 기묘사화 때 조정에서 밀려난 뒤 호를 사재(思齋)에서 팔여거사(八餘居士)로 바꿨다. 대체 뭐가 넉넉해졌다(餘)는 건가.
의아하게 여긴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 답은 이랬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자고,
땅에서 솟는 샘물을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 향기를 맡고,
이 일곱 가지 모두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고 지었다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친구는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 한다.
그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선비답게 산다는 것 - 안대회 지음, 푸른역사 -
**김정국(金正國)1485(성종 16)∼1541(중종 3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 팔여거사(八餘居士)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 김련(金漣)의 아들이며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향(趙有享)에게서 양육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4년(1509)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중종 9년(1514)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이어 이조 정랑(吏曹正郞) · 사간(司諫) · 승지(承旨) 등을 거쳐 중종 13년(1518)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削職)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학문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중종 32년(1537)에 복직되었으며,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케 했다. 2년 뒤에는 병조 참의(兵曹參議) ·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 중종 34년(1539)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많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뒤에 예조 · 병조 ·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성리학(性理學) · 역사(歷史) · 의학(醫學) 등에 밝았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서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해서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 《역대수수승통립도(歷代授受承統立圖)》 ·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 《기묘당적(己卯黨籍)》 · 《사재척언(思齋燧言)》 · 《경민편(警民編)》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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