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1961 ~ )
오래 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 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누군가 말했다.
들리는 것을 보고, 보이는 것을 듣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고.
이 시는 보이는 것을 듣는다.
귀갓길의 상상력 속에서 내 발자국 소리는 보인다.
오래된 아내가 보는 내 숨소리, 숨소리도 보인다.
이 작은 그림틀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것들을 보고 듣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삶을 순간 이해하는 것이다.
시가 주는 순간의 이해, 그것은 시가 오늘도 필요한 것임을,
문화라는 바지의 허리띠임을 깨닫게 한다.
위대한 삶도 하찮은 삶도 바지의 상상력 속에선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냥 삶일 뿐이다.
당신이 닫고 나가는 문 앞에서의 삶일 뿐이다.
소중한, 그러나 오래된, 낡은, 새로운 삶.
<강은교·시인>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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