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호] 은행
上京한 대구 상인, 나귀 맡기고 첫 대출 받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우리나라엔 구한말(舊韓末)에 설립된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47년 6월 조선상업은행은 지점이 39개, 조흥은행은 지점이 65개였다.
조선상업은행의 뿌리는 1899년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고종 황제의 황실 자금 3만원 등을 받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위 사진>(서울 남대문로에 있던 대한천일은행 본점, 현재 우리은행 종로지점)이다. 대한천일은행은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이다. 초대 행장은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등을 역임한 민병석(閔丙奭)이었고, 2대 행장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대한천일은행의 이름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강제로 변경했다.
조선상업은행의 뿌리는 1899년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고종 황제의 황실 자금 3만원 등을 받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위 사진>(서울 남대문로에 있던 대한천일은행 본점, 현재 우리은행 종로지점)이다. 대한천일은행은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이다. 초대 행장은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등을 역임한 민병석(閔丙奭)이었고, 2대 행장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대한천일은행의 이름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강제로 변경했다.
조흥은행은 1897년 개화 관료와 기업인 등이 설립한 한성은행<아래 사진>(서울 종로 광통교 인근에 있던 한성은행 본점)이 전신(前身)이다. 창립 청원서와 인가서가 존재하는 대한천일은행과 달리 한성은행은 설립 당시 청원서나 인가서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897년 만든 '한성은행 규칙', 독립신문에 낸 광고 등을 통해 한성은행이 1897년 설립됐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당시 한 대구 상인이 서울을 찾았다가 타고 온 당나귀를 담보로 맡기고 한성은행에서 대출받은 게 우리나라 최초의 대출이라고 한다.
한성은행은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하면서 '조선을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조흥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기네스협회는 1995년 한성은행이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이라고 인증했다. 다만 한성은행은 1903년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됐는데, 이를 두고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인 우리은행이 "한성은행은 1년 정도 운영하다 명맥이 끊기고서 새로 만든 것"이라며 "대한천일은행이 창립 후 꾸준히 영업을 해 온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최고(最古) 은행 자리를 두고 논란 중이다.
조선상업은행은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조흥은행은 이름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두 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출해 준 기업들이 부실화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상업은행은 공적 자금을 받으면서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된 뒤 2002년 우리은행으로 개명했다. 조흥은행은 2003년 신한금융지주가 인수했고, 2006년 신한은행과 통합되면서 이름이 사라졌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민간이 설립한 은행은 1959년 인가를 받은 서울은행이다. 이 은행은 서울신탁은행이 됐다가 2003년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출처:조선일보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제1호] ROTC (0) | 2010.09.24 |
---|---|
[대한민국 제1호] 이산가족 상봉 (0) | 2010.09.23 |
[대한민국 제1호] 외무고시 - 1950년 전상진·김학렬 두 명 뽑혀 (0) | 2010.09.13 |
[우리동네 옛이야기] [41] 강북구 수유동(水踰洞) (0) | 2010.09.08 |
[대한민국 제1호] 백화점 (0) | 2010.09.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