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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제1호] 산부인과 의원

by 까망잉크 2010. 12. 16.

[대한민국 제1호] 산부인과 의원

남자 의사가 첫 문 연 '신필호산부인과의원'

1925년 문을 연 '신필호 산부인과'는 한국인에 의한 대한민국 최초의 산부인과 의원의 등장이었다. 아녀자들이 몸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던 시절, 본격적으로 부녀자의 골반 질병을 진료하는 '해괴망측한' 의원의 출현이자, 산파에 의존하던 가정 분만에서 '병원 분만' 시대를 연 '첨단' 출산 시스템으로의 전환점이었다.

의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최초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남자였다. 신필호(申弼浩·1893~1952·사진 왼쪽)(허스트 박사와 함께 세브란스의전에서 회진하는 모습)는 청주에서 태어나 1914년 세브란스의학교(지금의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그의 숙부였다. 그는 당시 세브란스의 산부인과 담당 교수였던 선교사 제시 허스트 박사로부터 부인과 질병 치료와 현대식 분만법을 배웠다. 나무로 깎아 만든 여성의 골반 모형을 갖고 출산 처치법을 익혔다.

조교수까지 마친 신필호는 황해도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건 산부인과 의원을 열었다. 그 지역이 일찍 기독교가 전파됐다는 점이 최초의 산부인과를 여는 데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3년 후 신필호는 서울 인사동에서 같은 이름의 의원을 냈다. 당시 서울에는 산부인과의원이 4곳이었지만 한국인 의사로는 유일했다. 남자 의사가 산부인과를 열었다는 소식은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한옥을 개조한 그의 의원에는 환자들이 대기표를 갖고 기다릴 정도였다. 그는 11편의 산부인과학 논문도 쓰며 1935년 일본 구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뒤를 이은 산부인과 의사가 10년 후에나 나온 것을 보면, 신필호는 당시 관행을 깬 근대의학의 선구자이자 여성의 진료권을 향상시킨 선각자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심장마비로 59세의 삶을 마쳤다.

산부인과학에 대한 신필호의 헌신은 3대(代)를 이어 나갔다. 그의 아들 신한수 전(前)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는 1960년대 산부인과 전문의 면허 제도를 도입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손자인 현(現)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신희철(63) 교수는 고위험 분만 의학의 권위자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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