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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계집종이 이근택을 꾸짖다

by 까망잉크 2011. 2. 28.

 

계집종이 이근택을 꾸짖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轎前婢)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아내에게 억지로 맺은 조약(을사보호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이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는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뛰어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종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황현의 매천야록(허경진 옮김)에서

 

이근택(李根澤, 1865년 음력 8월 11일 ~ 1919년 양력 12월 17일)은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다.

본관은 전주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가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옮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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