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종이 이근택을 꾸짖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轎前婢)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아내에게 억지로 맺은 조약(을사보호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이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는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뛰어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종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황현의 매천야록(허경진 옮김)에서
이근택(李根澤, 1865년 음력 8월 11일 ~ 1919년 양력 12월 17일)은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다.
본관은 전주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가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옮 김>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애’의 탄생 (0) | 2011.03.10 |
---|---|
입이 내리 째진 짐승은 첨 보는데 (0) | 2011.03.09 |
[대한민국 제1호] 전기 (0) | 2011.02.16 |
[스크랩] 박정희의 독도 김일성의 백두산 (0) | 2011.02.15 |
[대한민국 제1호] 치과의사 (0) | 2011.02.08 |
댓글